불행과 행복 사이
불행과 행복 사이
  • 안희자 <수필가>
  • 승인 2015.06.0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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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안희자 <수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 신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앓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그녀는 동작을 멈추지 않는다.

가슴 좌우로부터 시작해 상하로 옮겨가며 촬영하는 동안 한순간도 수월하게 넘어가질 않는다. 살을 에는 통증이 온다. 이를 악물고 참아보지만 긴장한 탓인지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린다. 압착기계에 점령당해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움직이면 더 아프니 힘을 빼라지만 내 의지대로 되질 않는다. 이어 초음파까지 간신히 마치고 나왔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했다. 이후 재검진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한쪽 가슴에 작은 혹이 보인다며 정밀검사를 하란다. 가슴촬영과 초음파검사를 하기 위해 큰 병원에 온 것이다. 이상이 있으면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잠시 온몸이 굳었다. 예삿일이 아닌 듯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신경 쓸 걸. 누구한테 먼저 알려야 할까. 가족들에겐 비밀로 해야겠지, 마음만 조급해진다. 

불현듯 가족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눈물이 북받쳐 오른다. 그리고 나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 목록을 작성해 나갔다. 가족들에게 유서 쓰기, 내 손때 묻은 물건들 정리하기, 가족사진 찍기, 가족들과의 추억 여행, 가까운 지인들에게 전화하기, 마지막으로 남편과 함께 멋진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밥을 먹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니 오늘따라 남편의 뒷모습이 겨울나목처럼 쓸쓸해 보인다. 어깨도 더 처져 보이고 허옇게 뒤덮은 머리카락도 더 많아진 듯하다. 요즈음 툭하면 갈 날이 멀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걸 보면 그도 늙어간다는 증거일 게다. 그가 홀로 되었을 때를 상상하다가 측은지심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또 나의 분신인 아이들도 잘 성장하여 제 앞가림은 할 정도가 되었으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담담하고 아름다운 이별을 상상했지만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며칠 전 나는 고작 라면밖에 끓이지 못하는 남편에게 살림하는 법을 익혀두라고 권했지만 그는 기계가 다 알아서 할 일이고 내가 먼저 죽을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말란다. 사는 일이 내 마음대로 된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3년 전 그해 6월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날이었다. 우리 내외가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었다. 불행하게도 그날 아버지께 내려진 암 선고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5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떠나신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나도 한동안 어둠 속으로 침잠했었다.

한치 앞을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이 불행과 행복의 연속이라더니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절실하게 알았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옥죄는 불안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악성이 아니라 양성이니 안심해도 된다는 의사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병마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어제는 죽음이었고 오늘은 생이던가. 삶은 언제나 불행과 행복의 연속인가 보다. 삶과 죽음사이에서 고민하느라 온몸의 기운을 다 소진하고 나니 그동안 곁에 있던 가족들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어제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고민했고 오늘은 더 많은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허욕이 생긴다. 

나는 오늘 다시 허락된 삶에 대하여 깊이 감사한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곁에 있다는 것, 건강하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병원 문을 나서니 6월 햇살이 눈부시다. 어둡기만 했던 하늘이 깊고 푸르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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