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역사인물 한란·곽예·박춘무 아시나요
청주 역사인물 한란·곽예·박춘무 아시나요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5.05.20 17: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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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육청 발간 `길 끝에서 나누는 충북의 문화…'서 소개

고려 개국공신·대문장가·청주성 탈환 의병장 발자취 남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살아간다. 발을 딛는 고장의 곳곳에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의 숨결이 그대로 녹아 있고 역사적 인물의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학생들에게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심어주기 위해 충북도교육청이 발간한 ‘길 끝에서 나누는 충북의 문화이야기 열번째 이야기 - 청사에 남은 충북의 역사인물 열전’ 중 청주의 인물을 소개한다.

# 고려 개국공신 한란

청주한씨의 시조인 한란(韓蘭)은 청주지역의 대표적 호족이다. 한란은 928년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청주를 지날때 왕건의 10만 군대에게 군량미와 물을 제공해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太尉)에 봉해지고 개국공신이 됐다.

이와 관련된 유적지로 충북도 기념물 제84호인 방정(청주시 상당구 단재로 293번길)이 있다. 방정은 청주 방서 사거리에 위치한 무농정에서 약 200m쯤 내려가면 방서동 노인회관 그 밑에 위치해 있다. 방정은 모양이 네모꼴로 생겼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한란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가뭄이 심해 농사가 어려워지자 한란이 제수를 마련해 3일 동안 기도를 하다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북쪽에서 장수가 나타나 창끝으로 땅을 찌르니 맑은 물이 콸콸 흘러 나왔다. 한란이 꿈에서 깨어나 그곳을 찾아가 땅을 파보니 많은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왔다. 한란이 이곳에 큰 웅덩이를 사각형으로 파놓고 물을 가두었는데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

한란의 묘는 현재 청주시 남일면 가산리에 있다.

# 연꽃을 좋아한 고려 대문장가 곽예

본관은 청주, 자는 선갑이며, 호는 연담(蓮潭)이다. 곽예(1232~1286)가 출생한 1232년은 무신 정권의 집권자였던 최우가 몽골과 장기 항전을 결심하고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해이다.

곽예는 1255년(고종 42) 문과에 장원급제해 전주사록이 되었다. 1263년(원종 4) 웅신현(지금의 경상남도 창원) 물도에 왜구가 침입해 공선(貢船)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자, 첨사부 녹사로서 대관서승 홍저와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그는 화친첩(和親牒)을 가지고 왜구 침범의 중지와 잡혀간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했다. 충렬왕은 즉위 후 그의 명성을 듣고 발탁해 지밀직사사·감찰대부를 지냈다.

곽예는 글을 잘 지었으며 글씨체가 가냘프면서도 굳세어 당시 사람들이 그 서법을 본받았다. 그가 한림원에 있을 때에 비오는 날이면 맨발에 우산을 들고 혼자서 용화지(龍化池)에 발을 담그고 연꽃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 훗날 사람들이 그 풍치(風致)를 높이 여겨 그 일을 가지고 시를 짓는 이가 많았다.

곽예의 묘는 청주시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는데 상당구 명암동으로 이장했다. 묘소에는 곽예의 생애를 기록한 신도비가 있다.

# 임진왜란 최초 승전보 올린 의병장 박춘무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 순천, 호 화천당, 시호 민양이다. 박춘무(1544~1611)는 사육신 박팽년의 아우 인년의 8세 손이었던 기정의 넷째 아들이다.

1592년 4월부터 박춘무는 격문(어떤 일을 여러사람에게 널리 알려 부추기기 위한 글)을 보내 의병을 모집했다. 부모산에서 700명의 의병을 양성해 복대동에서 아들 동면과 아우 춘번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영규대사와 금산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조헌 선생, 우의대장 박춘무는 그해 8월 1일 청주성의 서문 밖에 이어져 있는 빙고현(현 청주 모충동 고개)에 집결해 청주성 탈환에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기상이 악화돼 주춤하는 사이에 왜군은 북문을 향해 달아났고, 의병군이 무혈 입성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청주성 탈환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보였다.

박춘무 전장기적비는 현재 청주시 남문로 2가에 있다. 박춘무와 관련된 대표적 장소로는 청주시 강서동 주봉마을에 있는 민충사가 있다. 민충사는 민양공 박춘무와 그의 종사관이었던 충익공 이시발과 아들 박동명이 받은 시호를 따서 지었다.

/김금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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