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단상
어버이날 단상
  • 임성재 기자
  • 승인 2015.05.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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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임성재 <칼럼니스트·시민기자>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감기라는 의사의 진단에 마음을 놓으신다. 요즘은 몸이 조금만 불편해도 큰 병은 아닐까 걱정하신다. 여든 다섯까지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고 말씀하시면서도 병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신다. 

특히 어머니가 무서워하는 병은 치매다. 외할머니의 병력을 이어받을까봐 예순 살 무렵부터 말없이 걱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군가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하자 화투를 치기 시작 하셨고, 칠십 무렵에는 손가락 운동이 치매예방에 좋다며 피아노를 배우셨다. 아직까지 이상 증상이 없으니 안심해도 좋으련만 경계심은 여전하시다. 

사실 치매는 무섭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기억을 잃기 시작해서 나의 존재조차 잊게 되는 병. 누구나 피하고 싶은 병이다. 

영화 ‘스틸 앨리스(Still Ali ce)’는 알츠하이머 환자 이야기다. 50살의 앨리스(줄리언 무어)는 세 자녀의 어머니이자 대학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남부러울 것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던 앨리스는 건망증이 부쩍 심해졌다는 것을 느끼고 병원을 찾아 간다. 그리고 자신이 조발성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가족과 슬픔을 나누며 자신이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삶을 최대한 기억하려 한다.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그녀는 셀프 동영상을 만든다. 기억이 있는 앨리스가 자신을 기억조차 못하는 앨리스에게 말한다. ‘침대 방 서랍장 속에 준비해 놓은 약을 한꺼번에 다 먹으라고...’ 기억을 잃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실행에 옮길 수 없을 만큼 잠깐의 기억도 허락되지 않는 순간이 되어 버렸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요.” 

자신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내일 잃을지도 모르는 지금 이 시간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삶의 태도는 깊은 감명을 준다. 한 평생을 바쳐 이루어 놓은 학문의 업적과 소중한 삶의 기억이 하나둘 망각의 세계로 사라지는 현실 앞에서도 그녀는 절망만 하고 있지 않는다.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까지도 ‘존재하는 생’ 을 지켜내려 애쓰며 가족들의 고통을 최소화하려 안간힘을 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도 잃어가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은 슬픔을 넘어 숭고함으로 다가왔다. 

연로하신 어머니는 앞으로 점점 더 건강이 나빠지고, 기력도 약해질 것이다. 남은 삶은 더욱 무뎌지고 기억도 차츰 희미해져 갈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흐를 것이고 언젠가는 긴 이별 앞에 놓일 것이다. 나 또한 어머니 옆을 지키며 그런 시간들을 어김없이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엘리스는 ‘상실의 기술’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소중하게 쌓아 놓았던 지난 기억들을 하나둘 씩 잃어가는 상실의 기술을 익히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그리고 그 많은 것들은 언젠가는 상실되기 위해 채워진 것이며 그것을 잃는다고 해서 재앙은 아니라고. 그렇다. 언젠가 우리는 지금의 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삶의 유한성과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잘 알기에 해를 거듭할수록 어버이날의 의미가 더욱 가슴 깊이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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