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살아서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고분들
죽어서도 살아서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고분들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04.2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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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고분이란 과거 우리 조상이 묻힌 오래된 무덤을 뜻한다. 그러나 단순히 오래된 무덤이라고 해서 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고분은 아니다. 고고학에서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한정된 시대의 지배층의 무덤을 고분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문자가 사용되기 전 선사시대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삼국통일 시기까지를 말한다.

충주에서 제천 쪽으로 충주터미널을 지나 우측 금릉동 지역에는 옛 조상의 흔적인 무덤들이(고분군) 있다. 조사결과 산의 능선 전체에 삼한시대로 추정되는 널무덤이 약 150기 정도가 조사되어 이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삼한시대의 역사를 밝혀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이 고분군에서 발굴되는 대표적인 유물로 토기류, 둥근 고리 큰칼, 말 모양 허리띠 고리, 쇠창, 쇠 화살촉, 재갈 등이 있다. 특히 말 타는 사람 장식이 달린 토기, 말 모양 허리띠 고리는 당시 충주지역에 마한 54개국 중의 하나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그리고 학계를 주목하게 한 것은 널무덤이다. 널무덤 양식은 낙랑과의 교류 내지 낙랑 유민 유입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아직도 학계 관심을 받고 있다. 둥근 고리 큰칼의 출토는 이 시기 충주 일대에 강력한 권력의 무사집단 지배계급이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고대국가 이전의 삼한 시대 역사의 고리를 연결하는 의미도 있다.

충주 탄금대와 중앙탑 사이의 능머리산 일대에는 삼국시대의 수백 기 무덤들이 있다. 이곳에 있는 고개 이름을 무지 고개라 부르는데, 무지는 무덤을 뜻하는 것으로 예로부터 무덤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조사 결과 약 230여 기 정도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주로 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뚜껑을 덮은 굴식 돌방무덤이 주류를 이루고 천장 또한 반원아치형을 하는 것도 있었다. 이 무덤군 중에서 가장 대표되는 1호분은 높이 6m, 둘레 60m의 대형 고분에 속하는 무덤이었다.

삼국의 도읍지가 아닌 지역에서 이렇게 돌방무덤이 존재하는 경우는 드문 경우이다. 출토된 유물도 후기 신라 양식의 토기를 비롯한 덩이쇠, 금귀걸이 등 신라 귀족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나왔다.

무덤의 크기, 종류, 유물 등을 통해 이 고분은 삼국시대 이래 중원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삼국의 관심을 보여주는 유적지로서 평가되고 있다. 신라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신라 진흥왕이 충주지방까지 그 영역을 확대한 후 중원소경을 설치하고자 귀족(진골)들을 이주시켜 한강유역을 장악하고자 하였던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경주에서 이주해온 신라 귀족들이 이 지역의 중심 지배자로 토착화하면서 이러한 대규모 고분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고분은 형식이나 출토유물들을 통해 당시 우리 조상의 삶이 담긴 위대한 예술 작품인 동시에 그 시대 생활상을 연구할 수 있는 우리 고장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적 상황 등을 알려주는 역할에서 나아가 자긍심과 관심을 제고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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