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탓
날씨 탓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4.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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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포도원을 복숭아밭으로 바꾸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엄청난 위력의 태풍에도 꿈쩍 않는 육중한 포도 비가림 시설을 철거해야 하고, 가로세로 바둑무늬처럼 철사를 늘여 설치한 천장의 덕을 걷어내야 하고, 한해라도 더 수확하느라 한 골 건너 한 골씩 남겼던 포도나무도 캐내야 하고, 원래의 두둑도 허물어 복숭아나무에 적당하도록 바꿔야 한다. 장정의 손이나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하는 일이 많지만 내 손으로 해야 하는 자잘한 일도 많다.

하여 올 봄에는 밭에서 살기 일쑤였는데 그 일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미세먼지 때문에 좋은 공기는 아니지만 큰일을 마친 내 마음은 화창한 봄날만큼이나 맑다. 커피잔을 들고 자주 들여다보지 않던 과수원 입구 포도밭 쪽으로 향한다. 거름 내고 전지 작업까지 한 뒤로 한동안 지나치기만 한 포도밭이다.

벌써 꽃봉오리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복숭아나무와는 달리 포도나무는 아직 겨울눈을 굳게 감고 있다.

작물은 농사꾼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거늘, 늘 지나치기만 한 것이 미안해 서성이는데 누가 밭으로 들어온다. 운동을 위해 읍내에서부터 걸어서 가섭산에 다니는 사람인데 오가는 길에 포도원에도 가끔 들르고는 한다.

“처음부터 복숭아나무를 심지 왜 포도나무를 심어 캐내느라 저 비싼 시설을 철거하고 이 야단이에요?”

옳은 말이다. 농사에 대한 철학도,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도 없이 그저 돈이 안 되니까 자식처럼 여긴다던 포도나무도 매정하게 잘라내지 않았던가.

복숭아가 좀 비싸다 싶으니까 너도나도 복숭아를 심어 다 같이 망하게 생겼다, 차라리 체리나무나 블루베리를 심을 걸 그랬다, 전망 좋은 약초도 있다던데 등등. 그는 빨리 가지도 않고 서서 경솔하게 작목을 바꾼 나에게 장황한 훈계를 했다.

우리 과수원은 가섭산 올라가는 길가에 있다. 오가는 차도 빈번하고 등산객도 자주 눈에 띈다. 정기적으로 등산하는 사람 중에는 과수원을 구경하느라 들렀다가 인사 정도는 하게 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눈에는 내가 참 딱해 보인 것이다. 웬 여자가 포도원을 한답시고 엄청난 시설을 하고 그럴듯하게 포도나무를 길러놓더니, 한창 수확할 나이의 포도나무를 자르고 이제 와서 복숭아나무를 심다니…. 그래서 염려하는 마음에 한 마디씩 격려해 주는 것이다.

참 이상했다. 격려의 말도 자꾸 듣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피로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자식을 잘 못 키운 어미가 타인으로부터 훈계를 듣는 기분이었다가, 어느 때는 멀쩡한 자식을 버린 비정한 어미가 타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기분도 드는 것이다. 발길을 돌리면서 그가 한마디 더 한다.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슬슬 하세요. 인생 뭐 별 거 있어요?”

기분이 묘하다. 우리 동네에는 나보다 더 큰 과수원을 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타인으로부터 성실한 농부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나는 왜 내가 좋아하는 농사를 짓는데 욕심이라는 말을 듣는 걸까.

화창한 봄날같이 맑던 기분이 다시 어두워진다. 아무래도 중국에서부터 날아오는 미세먼지 농도가 짙은 날씨 탓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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