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달 따러 가자
아이야 달 따러 가자
  •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 승인 2015.03.0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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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스크래치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설은 나가서 쇠어도 보름은 집에서 쇠어야 한다’는 보름날 달을 보기 위해 가출했다. 높고 한적한 곳에서 달을 보려고 한다. 앞산이면 어떻고 뒷산이면 어떠리. 마음 가는 곳, 발길 닿는 곳이 명산이지.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시간 공기가 참 맛있다. 산에 오르는 내내 기분이 상쾌하다. 달이 떠 있어야 할 시간에 달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꼭꼭 숨었는지 “날 잡아 봐라”한다. 한참 숨바꼭질을 한 달이 베일에 싸인 신비로움으로 구름 속에서 살짝 형체만 보이더니 다시 사라진다. 달무리 속에서 해쓱한 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생기가 돈다.

정월대보름. 일년 중 가장 큰 달(Super Moon)이 뜨는 날이라지만 올해는 일년 중 가장 작은 보름달(mini moon)이 떴다. 내가 보기에도 정말 작다. 산새소리 들으며 달을 본다. 작아서 귀엽고 앙증맞다. 천지인(天地人)이 합일한다는 정월대보름날, 청주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내가 천지인의 주체가 된다. 어둠과 고요 속에 나는 달과 합일할 수 있도록 자신을 달에 얹어 본다. 비록 작은 달이지만 내가 들어가서 노닐기에는 충분하다. 달 속에 잠긴 나를 끄집어내 어릴적 추억을 더듬으며 산길을 내려온다.

정월대보름이 되기 전날 동네 사람들이 모여 매년 우물을 청소했다. 왜 하필 오늘 청소하느냐고 물으면 엄마는 오늘이 땅속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뒤집어지는 날이라고 했다. 매일 솟아나는 샘물을 먹었지만 정월대보름날 먹는 샘물은 특별한 생명수로 동네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우물가에 앉아 오곡밥과 나물준비로 시끌벅적했다. 아이들은 볏짚가리가 쌓여있는 논에서 구멍을 뚫은 깡통에 관솔불을 넣고 “망우리여”하며 쥐불놀이를 했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망우리여”가 아니라 달이 꽉 찼다는 뜻이 담긴 “망월이여”였다. 글말이 아닌 입말로만 배워온 강한 할머니식 언어학습이 아직도 화석화되어 내가 상당히 촌사람임을 증명해 준다.

꽝꽝 언 논에서 일명 시게토라는 것을 타던 것이 어린 우리에게는 유일한 겨울놀이였다. 논 한가운데 불을 지펴놓고 놀다가 발이 시리면 불가에 둘러앉아 몸을 녹였다. 그때 주로 입고신고 다니던 소재가 나일론이었다. 불을 쬐다 보면 나일론 양말에 불이 붙어 화장을 입은 친구들이 많았다. 심지어 옷에 붙어 낭패를 본 오빠들도 있다. 정신없이 놀던 아이는 엄마들이 부르는 소리에 하나 둘 빠져나가고 그때야 논은 조용해졌다. 

집에 오면 엄마는 오곡밥과 갖은 나물을 준비해 밥상을 차렸다. 지금도 엄마가 차려놓은 나물과 국이 눈에 선하다. 아주까리볶음, 마른가지볶음, 호박볶음, 고사리볶음과 시래기, 냉이에 콩가루를 넣어 무랑 고사리, 콩나물을 넣고 끓인 국이다. 곁들여 나온 무 넣고 조린 고등어와 코다리조림도 일품이었다. 

내 고향은 설날과 보름날에 안동식혜를 즐겨 먹는다. 안동식혜는 흔히 말하는 식혜에 생강과 무, 고춧가루를 넣어 칼칼하면서 아주 깔끔한 맛을 준다. 안도현 시인은 안동식혜를 보고 생리한 여자속옷을 빨아놓은 것 같다고 했다. 빨간색이 감도는 안동식혜는 얼핏 보기에 그 표현이 제법 그럴듯하다. 저녁을 먹고 엄마는 가족의 안녕과 동네의 평화를 위해 앞산에 뜬 둥근 달을 보고 기원했다. 엄마가 바라보던 달을 오늘 내가 보고 있다. 손으로 하늘에 있는 달을 슬쩍 잡아 본다.

미니 보름달을 따서 내려오는 길, 달빛 젖은 건너편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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