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라 속으로 들어가다
문 태 준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 툭 터지고
물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
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 파안대소하고
산까치의 뾰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
나는 이 모든 찰라에게 비석을 세워준다
시집 '가재미'(문학과지성사)중에서
<김병기시인의 감상노트>
우주에는 우주의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은 한 번의 끊임도 한 번의 흩어짐도 없이 이어져 있다. 나도 그 안에서 번데기처럼 자랐고, 나비처럼 날고 있으니 따로 말할 필요가 있으랴. 그 안에 아주 짧은 시간이 있으니 찰나(刹那)인데, 지금의 단위로 애써 말하면 0.013초 정도라고 한다. 그 찰나에서 모든 사물이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한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늘여보면 억겁의 응축인 것이다. 쌓임 없이 생긴 생명이 있겠는가. 그러하니 자세히 보라. 밤송이 툭 터지는 일이나, 물고기 몸이 확 휘는 일이나, 꽃망울이 함박웃음 짓는 일이나, 감이 툭 떨어지는 일이나, 사람이 홀연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이 다 찰나다. 그 생명의 꽃에게 비석 하나쯤 세워두는 건, 내가 가야할 길 잘못 들어 헤맬 때 찾아가려는 거다. 비석 하나 세우는 일을 다른 말로 '사랑하기'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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