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날에 맞이하는 새해
열흘날에 맞이하는 새해
  •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 승인 2015.01.1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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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스크래치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마음이 숙연해지는 아침이다. 새해가 밝은지 열흘째 되는 날. 나는 마음을 다잡고 새 출발을 하려고 한다. 남들이 의식하고 있는 1월 1일 새해가 내겐 1월 10일인 셈이다. 우리 조상이 지켜왔던 동양의 설날이 아직 한달 더 남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새해가 밝기 전 묵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집 가까이에 있는 온천에서 목욕재계했다. 목욕재계는 내가 어릴 때부터 늘 해왔던 새해 의식 중 하나다. 이른 새벽에 뽀독뽀독 소리가 나도록 씻고 왔는데도 정신이 영 묵은 기억의 저편에서 떠나지 않았다. 엉뚱하다 하겠지만 내 달력은 2014년이 375일이었고, 2015년 새해가 1월 10일이다.

두번째 의식으로 거행하는 일이 산행이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하고 망설이는 찰나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 함께 하고 싶은데 시간 어떠냐고” 한다. 밀린 일을 잠시 생각하다 접고 친구랑 산행하기로 했다. 행선지를 뒷산 구룡산에서 계족산으로 바꿨다. 단단한 내 새해 의식에 비해 친구는 오늘 산행이 말랑해 보였다. 함께하는 여행이 좋은가보다. 들떠 있는 친구와는 달리 나는 한 발 한 발 디디면서 버릴 것과 시작해야 할 일들을 머리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며 걸었다.

계족산은 등산객들의 건강을 위해 맨발로 등산할 수 있도록 길 양옆으로 황톳길을 조성해 놓았다. 겨울의 황톳길은 살얼음과 질척거림이 발길을 조심스럽게 한다. 텃새가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 우리가 혹시나 불평이라도 할까 봐 나무 사이를 오가며 음표를 튕긴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과 고요한 산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언제라도 함께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 더 좋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나를 인정하고 내 편이 되어주는 좋은 친구가 몇 있는 건 큰 축복이다.

투명한 하늘처럼 철없는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이면 “세상은 다 너 같지 않아. 가끔은 구름처럼 커튼을 쳐봐” 하고 말해주는 친구, 산에 휴지를 슬쩍 던지는 은연중의 행동처럼 결점이 보여도 듣기 좋은 말로 조언을 해주는 친구가 있어 나는 늘 행복하다.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중턱에 앉아 세상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산머리에서 부스럭거리며 짐승 소리가 들린다. 꽤 큰 짐승이다. 멧돼지 네 마리다. 우리가 놀라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도 먹이를 찾아 나선 그들은 꾸르룩 꾸르룩 산비탈을 내려오려고 먼지를 일으키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급기야 우리는 화장실로 피신했다. 그들의 행방이 묘연해져서야 우리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산길을 걷다보니 쭉쭉 뻗은 메타세쿼이아가 즐비한 길이 나온다. 야릇하게도 그들은 꼭 여성의 성기같이 생긴 곳에 한두 나뭇가지가 쐐기를 박고 있다. “야한 것들”하며 웃는 사이 주위가 어두워졌다. 급한 마음에 샛길로 들어선 것이 화근이 되어 길을 잃고 말았다. 산중이라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늪지에서 숨어 있던 철새떼가 일제히 비행하기 시작한다. 새들의 움직임에 길 잃은 내 두려움이 얹혀 하늘이 출렁거려 보인다. 캄캄한 산중을 헤매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예정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더 걸렸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나는 날, 한 해의 계획도 잡지 못한 채 ‘급할 때는 아는 길로 가라’는 말만 되새기며 1월 10일 나는 2015년 새해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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