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내리는 날의 풍경
겨울비 내리는 날의 풍경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1.0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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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수안 <수필가>

한국포도회 연말 이사회가 열렸다. 회의장에는 묵직한 긴장감이 감돈다. 창 너머로 내리는 겨울비 탓이 아니다. 작년에는 평년과 비교해 수입이 절반에 불과한 농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창 포도 수확에 바쁘던 지난 8월 말쯤이었다. 작업복도 갈아입지 못하고 찬거리를 사러 하나로 마트에 간 나는 입구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아저씨도, 아주머니도, 할머니도 마트 문을 나서는 사람들이 손에 포도를 한 상자씩 들고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일까. 안으로 들어가 포도 진열대 앞의 가격표를 본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캠벨 포도- 5킬로그램 한 박스에 8,900원’. 8,900원에서 인건비, 농약비, 거름값, 박스비, 수송비, 중간 이윤, 거기다가 임대 농일 경우 임대료까지 다 내고 나면 농사꾼 주머니에 들어가는 순수익은 몇 푼이나 될까. 

농사를 짓다 보면 이 녀석이 얼마나 잘 자라나, 뭐가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은 없나 늘 관심을 두게 된다. 나 같은 무녀리 농사꾼도 자꾸 관심을 두다 보면 작물이 무얼 원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원하는 것을 주면 표시 나게 건강해지고 잘 자란다. 그럴 때면 내 말을 알아들은 나무가 신통방통해 삐걱거리는 무릎 통증도 잊을 만큼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렇게 재미난 것이 농사라 해도 소득이 보장되지 않으니 회의장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내가 어릴 때는 농사꾼이나 농부라는 말보다 농군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국민의 먹을거리를 책임진 농군도 육·해·공군과 더불어 국가 안보의 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는 뜻이었을 게다. 

하지만, 정부는 농업을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중요한 산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지타산 맞지 않는 못난이로만 본다. 하여 한국포도회가 포도를 제값 받고 팔 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사회를 열어 지혜를 모으게 된 것이다. 하지만, FTA 체제하에서 수입 포도가 엄청나게 들어오는데 과연 이 일이 순조로울까.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그 어려운 일의 맨 앞에 포도의 명장 B 회장님이 서기로 했다. 대의를 위해 대농인 본인의 포도밭 일은 어느 정도 희생하기로 각오했음 직하다. 

“한국포도회 연구분과에서 권장하는 재배법으로 안전하게 생산한 좋은 포도를, 너무 높지도 않지만, 너무 낮지도 않은 좋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계획이 잘 된다면 기적이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농사꾼이 영업에 나서는 일이다. 머리를 맞대고 시름에 잠긴 이분들에게는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무슨 계책이나 비책 같은 건 없다. 꼼수도 모른다. 정직하게 농사지어 정당한 가격을 받는 것이 소원일 뿐이다.

회의가 끝나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을 타고 더 많은 겨울비가 내린다. 회의가 길어지는 동안 날씨가 사나워질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미쳐 우산을 준비 못 한 이사님들이 머뭇거린다. 

이사님들이 냅다 빗속으로 달린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회의 자료집을 얹고 뛰는 뒷모습이 농업이 처한 현실만큼이나 처연하다. 존경심과 연민이 동시에 인다. 목구멍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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