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64>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6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0.2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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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의 서전

그릇된 허영이 부른 로마 흥망의 역사

   


한(漢)대부터 중국 비단은 월지나 흉노들의 중계로 로마에 대대적으로 유입되어 사치품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질이나 문양이 워낙 뛰어나고 이색적인데가 멀고 먼 실크로드의 사막과 험산 준령을 넘느라 운반비가 많이 들고, 거기에 경유국마다 부과된 세금까지 합치니 로마 현지에서의 비단은 실로 금과 같이 취급되는 고가의 귀중품 중의 귀중품이 되었다.

로마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BC 100~44)는 극장에 나타날 때면 꼭 비단옷을 입곤 하였다. 그 후 로마의 남녀 귀족들 사이에 비단옷만을 입는 풍조가 일어 비단이 고갈될 우려가 생기기까지 이르렀다. 비단은 돈을 가진 부자들에게는 자신과 대중을 구별하는 아주 적합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비단이 나무에서 자라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던 플라니우스 같은 이는 '여성들이 거의 반라(半裸)로 거리를 오가는 것에 격분했고, 비단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을 로마 정신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로 생각했다. 제정 초기 황제 티베리우스(재위 14~37)는 남자들의 비단옷 착용을 금지하는 칙령까지 내린 바 있으나 비단 애용의 기세는 줄지 않고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 당시 로마제국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 강성했고, 귀족과 신흥졸부들을 비롯한 상류층들은 신분의 상징으로 비단을 걸치고 다녔다. 그들에게 비단 가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양의 타락은 비단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역사적으로 서양의 타락은 비단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혹평하는 서양 학자들도 있다. 처음에는 올곧고 도덕적인 원로원 의원들도 나중에는 향수를 뿌리고 여자처럼 하늘거리는 비단을 걸치고 성도착적인 행위도 마다않는 타락한 권력자로 변해갔다. 쾌락주의와 애로틱한 춤과 마약, 일부다처제, 그룹섹스, 그리고 중국과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건너 온 환상적이고 자극적인 방중술도 모두 동양에서 기원한 것들이다. 로마의 사치스런 생활은 국가 재정에 파탄을 몰고 왔다. 동양과의 무역수지 적자폭은 점점 더 커져갔고, 로마의 돈은 계속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급기야는 로마의 정신이라고 존경받던 세네카와 플라니우스는 고대 로마의 은화가 해마다 1억 세스테르스 이상의 막대한 돈이 사치품을 수입하기 위해 국외로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동양인들에 비해 서양인들이 수출할 품목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로원이 국가재정 파탄을 막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수입과 무역을 제한하는 것밖에 없었다. 로마는 비단에 25%의 수입관세를 매겼지만,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인간의 허영심과 관련된 상품일수록 더욱더 그러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마제국은 한층 더 가난해졌지만, 로마인들은 사치를 포기하지 못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자신의 비단옷을 팔아서 고갈된 국가 금고를 채우려하였으나 그러한 시도마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세기경부터 몇 세기 동안 로마의 비쿠스 투스쿠스 지역에는 전문 비단시장이 개설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2세기 때 로마의 서쪽 끝 도시인 런던에서 비단이 성행한 것은 '중국 낙양에 비견된다'고 하였으니 당시 비단이 로마인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비단 선호 풍조는 아우렐리우스(재위 270~75) 황제 시대에 더 심하게 만연되었다. 380년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귀족들에게만 사용이 허용되던 비단이 이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최하층까지 퍼졌다'고 4세기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가 개탄한 바 있다.

410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세례식에는 전시민이 비단과 보석으로 장식한 의상을 입고 참석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2세(재위 565~78) 때 메난드로스는 '로마인들은 비단을 어느 민족보다도 더 많이 소비한다'고 기술하면서 동방령(東方領)의 장군 제마르코스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우회하여 서돌궐과 비단무역로를 뚫기 위해 천산지방으로 파견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세레스의 실체가 오랫동안 서방에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은 것은 실크로드 서단을 장악하고 있던 파르티아(페르시아, 安息)가 막대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비단무역을 독점하고 그 비밀을 서방에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한서 '서역전'은 로마는 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직접 통상을 시도했으나 파르티아가 중간에 차단하곤 하여 여의치 않았으며, 그 결과 비단의 비밀을 오래도록 알아 낼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漢)이 로마와의 직접 통사(通史)도 안식의 고의적인 방해로 말미암아 성사될 수가 없었다.

페르시아제국은 기원전 224년부터 129년까지 거의 100년간 실크로드의 서단 요로를 통제했으며, 7세기 중엽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인들에게 패망할 때까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실권자로 군림하여 중국과 서역 간의 교역을 중간조절하면서 비단을 독점하였다. 비단무역을 둘러싼 페르시아(파르티아)와 로마제국간의 갈등도 때로는 대단히 첨예하여 앙숙관계가 더욱더 심화되었다.

中 양잠 직견기술 도입해 자체생산

페르시아는 중국 비단의 중계자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수용자와 소비자이기도 했다. 그들도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을 사용하였으나 수요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중국으로부터 양잠 직견기술을 도입해 각종 질 좋은 비단을 자체 생산하게 되었다. 중국 측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늦어도 6세기 초 이전에 전수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페르시아가 생산하는 고급 비단인 무늬 있는 흰 비단인 기환(綺紈)은 그 섬세함이나 짜임새에서 원산지 중국을 능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황금시대인 당 제국 말엽 탈라스(Talas) 전투에서 고선지장군의 군대가 이슬람 군에게 패배함으로써 중국의 북서부지역은 이슬람화 과정을 겪게 되었다.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한 이슬람 세력은 포로들 가운데 종이제조 기술자를 확보하였고, 싸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 제지업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당(唐)제국의 몰락과 함께 비단길도 쇠퇴의 역사를 겪게 되었다. 당 제국 내부의 심각한 분열과 더불어 북방 영토에 대한 이민족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실크로드의 쇠퇴와 더불어 융성하였던 불교문화권도 점차 이슬람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이슬람교도들은 수많은 불교회화나 불상 등과 같은 귀중한 불교문화를 무자비하게 파괴함으로 사원과 사리탑이 사라져 갔다.

한편, 비단을 다량으로 소비하는 로마인들은 일찍부터 비단의 생산 비밀을 알아내려고 노력하였지만 페르시아의 중간 차단과 중국인들의 비단유출 통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작 수입된 비단을 해체하여 재가공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마침내 유스티니아누스(재위 527~565) 황제는 인도 북부 세린다 국에 다년간 체류한 경교(景敎) 신부들의 방문을 받게 된다. 신부로부터 비단생산 기술에 대한 보고를 받고 얼마간의 선불금과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다고 당시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500~565)가 전하고 있다. 신부들은 황제와의 약속을 지켜 세린다로 돌아가 지팡이에다 누에 애벌레와 뽕나무 씨앗을 몰래 숨겨서 비잔티움으로 반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비단산업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페르시아의 상업독점권과 중국의 생산독점권은 사라지게 되었다. 4000년 동안 중국의 부를 창출하던 국가기밀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로마의 비단문화는 비로소 발아하기 시작하였다. 서유럽 국가들이 비단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500여 년이 더 지난 십자군 원정 때 시칠리아의 로게르 2세가 그리스국을 노략질 하면서 비단 제조업자들을 시칠리아로 끌고 오면서부터였다.

각종 화학섬유로 만든 첨단직물이 쏟아져 나오는 오늘날에도 비단은 여전히 질이나 문양에서 피륙의 으뜸 자리를 지키고 있다. 3~4000년의 역사를 헤아리는 비단이 인류의 물질생활 향상과 동서간의 문명교류에 미친 영향이나 기여하는 바는 실로 막대하다. 어쩌면 인류의 문명을 바꾼 중국의 4대 발명품보다 더 유구하고 위대한 발명품의 하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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