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을미개혁, 을미의병
을미사변, 을미개혁, 을미의병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4.12.30 18: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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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 <천안·아산>

갑오년에 이은 을미년도 역사상 간지(干支)로 기억되는 해다. 120년전인 1895년, 민비(후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되고(을미사변), 친일정권에 의해 단발령이 내려지고(을미개혁), 이 두 사건 때문에 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바로 전해인 갑오년과 연장선에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갑오년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이어 한반도가 청일전쟁터가 됐고 갑오경장이 행해졌다. 이후 간지로 기억되는 을사늑약(1905), 경술국치(1910), 기미독립운동(1919) 등이 일어났지만 120년 전 을미년처럼 3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 ‘을미’ 이름이 붙어 불린 적은 없다.

1895년 초 일본은 독(毒)이 올라 있었다. 청일전쟁 승리에 따른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랴오둥 반도를 차지했으나 러시아 주동으로 독일·프랑스가 소위 ‘3국 간섭’을 벌였다. 결국 랴오둥을 반환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얄밉게도 그 대가로 랴오둥 반도의 항구 뤼순, 다롄을 조차 받았다.

조선도 러시아를 이용해 일제를 견제하려 했다. 러시아에는 탁월한 외교관 베베르(웨베르라고도 부름)가 있었다. 1885년 첫 주한(駐韓) 러시아공사로 부임, 10년 넘게 근무했다. 고종과 민비 모두 그를 좋아했다. 1895년 7월 러시아는 일본을 의식해 베베르를 멕시코주재 공사로 전보키로 했는데 고종은 이 소식을 듣고 그를 유임시켜 달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한달 후인 8월(음력), 러시아공사 교체기에 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의 지령을 받은 미우라공사가 일본 불량배를 동원해 궁궐에 침입, 민비를 시해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벌어진 것이다. 당시 일본수상은 이토 히로부미, 외상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11월 김홍집 친일정권은 단발령(斷髮令)을 선포했다. 성년 남자는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고종의 칙령이 내려졌다. 고종과 황태자가 솔선수범해 머리를 깎고, 내무부대신 유길준은 관리들이 칼과 가위를 가지고 거리나 성문에서 백성들 머리를 깎게 했다.

단발령은 을미사변으로 점화된 의병에 불을 질렀다. 이른바 을미의병이다. 제천의 유인석, 홍주(홍성)의 김복한, 춘천의 이소응 등이 이듬해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다.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왜적을 토벌하자”는 기치를 걸고 인근 관아를 점령하고 서울로 올라갈 기세를 보였다. 1896년 2월 고종이 베베르 및 친러파의 주선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도피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고, 동시에 친러내각이 등장했다. 새 내각이 단발령을 철폐하고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리자 의병활동은 잠잠해졌다.

갑오·을미년 등으로 이어지던 120년 전은 일본과 청나라·러시아가 우리나라를 사이에 두고 엎치락뒤치락하던 때였다. 그 사이에서 친일파·친러파에 친미파까지 준동했다. 자주독립은 안중에 없고, 외세에 편승해 영달을 꾀하던 무리도 섞여 있었다. 이완용이 대표적이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동시에 광무개혁을 단행했고, 독립협회가 설립돼 외세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으나 그 한계는 명확했다.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안은 묵살됐고, 독립협회는 해산됐다. 왕은 국민주권주의에 의한 근대적 국가를 원하지 않았다. 

을미년도 조선 왕실과 지도층의 무능함,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낸 한 해였다. 12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또 미·중·일·러 등 강대국 한가운데 놓여있다. 위정자들이 줏대 있는 대외정책을 펴나가야 국운이 바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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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선 2014-12-31 19:59:37
올해 을미년인대.. 진짜 역사적으로 슬픔도 많았던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