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는 매달릴 만큼의 꼭지를 만든다
열매는 매달릴 만큼의 꼭지를 만든다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4.12.2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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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영숙 <시인>

시간 빈곤자로 살아온 1년, 달려온 길을 돌아보니 뿌연 흙먼지가 난무하다.

감정의 도끼날에 찍혀버린 시간이 낙엽처럼 뒹군다. 다독이지 못한 시간이 의붓자식처럼 등덜미를 잡고 발버둥 치는 십이월 끝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몇 시간을 달리다간 미처 따라붙지 못한 영혼을 기다리느라 한 시간 정도를 쉬어간다고 한다. 시간 빈곤자란 신조어에 공감할 정도로 그렇게 바쁘게 달려왔다. 정신없이 경주마처럼 달리다 보니 올해는 그 좋아하던 가을도 실종상태다. 그 바쁨이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한 일들이었는지 자문한다. 

깊어가는 겨울, 새로운 시간의 문을 열기 전에 정리할 것이 많아 바랑을 꾸리고 인적 드문 고향 산을 찾았다. 중턱에 오르자 생강처럼 알싸한 바람이 온몸으로 스며들면서 심신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겨울 산은 성전이다. 부러진 나무 꼬투리 하나 지팡이 삼아 중턱에 오르니 곧게 솟은 참나무 사이로 햇살이 화살처럼 번진다. 나무는 열매만큼의 잎을 만들고 열매는 매달릴 만큼의 꼭지를 만들며 저마다 순리대로 살아온 일 년, 순하게 사노라니 벌과 나비 앉았다 간 자리에 꽃이 피고 서둘러 꽃을 버린 자리에 열매를 매달 수 있었으리. 

빈자의 가슴으로 묵언 수행하듯 동안거에 드는 겨울 산, 저마다 꽂진 자리에 열매 맺고 된서리 맞아가며 달게 익어간 꼭지마다 잘 살았다는 흔적이다. 꼭지마저 흔적 없이 내려놓고 빈 몸으로 새봄을 준비하는 모습은 거룩한 성자이다.

여고 시절 수없이 드나들며 문학의 시심을 키우던 곳, 선조들의 산소 옆에 기대앉아 걸어온 길을 내려다본다.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럽다고 산행을 만류하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고집스레 오른 길이어서 멀리 가지 못하고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참나무 가지를 덮고 있던 눈 한 줌이 얼음 먹은 잎사귀 위로 떨어지며 봉긋한 무덤을 만든다. 

둥근 도토리 한 알 참나무 땅속 밑으로 밀어주는 일, 밤톨 하나 다람쥐에게 내어주는 일도 눈빛 하나 살리는 일이고, 그들처럼 서로 마주 보며 끄덕이는 일도 등불 하나 켜는 일이다. 한여름 저마다 목소리 높여가며 존재의 그늘을 넓혀갈 때 담 밑에서 호박처럼 함박웃음 짓는 일도 행성 하나 빚는 일이다.

올해는 공적으로 아픈 일이 많았다. 그래서 여유롭게 하늘이나 감상하며 아름답게 시 쓸 일도 없었고 끼니때마다 밥 챙겨 먹는 일용한 양식에 대한 감사도 못 했다. 이따금 나뭇잎 하나 어쩌지 못할 포효만 먼 하늘 가득 먹구름처럼 풀어 놓았다. 

무수히 쏟아놓은 지성의 불꽃들이 강단을 메우고 신문칼럼을 장식해도 알몸의 겨울나무 같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이며 울 밑에서 호박처럼 함박웃음 짓는 일만 못 하다. 이성복 시인의 호통처럼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하는’ 그 만의 옹알이며 사적 공명일 뿐이다.

이제는 절전 모드가 필요하다. 시간의 문을 열고 내보내야 할 것들과 들여보내야 할 것들을 분류해야 한다. 로그아웃, 로그인!

푸른 광장 열리며 시간을 부르는 타종이 여기저기 흩어지면 새롭게 포맷한 자아를 만나야 한다. 글을 쓰는 이들에게 구멍은 매력이 아니라 실책사유다. 인문학적 신념과 공적 담론을 갖추고 그들이 맺어야 할 열매와 그들만큼의 꼭지를 만들며 그 자리만큼의 역할을 다할 때 언술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각혈한 글쓰기를 한 것이고 그것이 이 사회에 등불 하나 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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