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
도장
  • 안희자 <수필가>
  • 승인 2014.12.1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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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안희자 <수필가>

아버지 돌아가신 지 열흘째다. 오늘은 오빠의 부탁으로 유산 상속포기 서류에 도장을 찍는 날이다. 서류에 도장을 찍고 돌아서는 순간, 문득 도장을 만들어준 그녀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오래전 내가 운영하고 있던 가게에서다. 어느 날 목발을 짚고 넘어질 듯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젊고 예뻤지만, 가녀린 몸매에 심하게 절룩거리는 하반신이며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난 조막손은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였다. 그녀는 노인 분께 선물할 화장품을 골라달라고 했다. 그리곤 길 건너 앞집에서 도장포를 차렸다는 말을 하고 돌아갔다.

얼마 후 나는 도장을 새기기 위해 그녀의 집에 들렀다. 가게 안은 비좁았다. 그녀가 작업대 앞에 앉았지만, 몸은 이내 한쪽으로 쏠려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이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굽은 손으론 힘겨워 보이는데도 그녀는 능숙하게 도장의 글자를 새겨 나갔다. 마치 세상일을 잊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녀는 도장을 새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닥에 버려진 부스러기들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 그녀의 아픔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나무에 홈을 내어, 버리고 새기기를 반복하면서 때론 장애를 원망하거나 때론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수없이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상처가 아물기까진 쓸모없는 부분은 파내어 버리고 소중한 부분은 곱게 다듬으며 무진 애를 썼으리라. 어찌 보면 그녀의 손재주는 삶에 대한 애환이 장인(匠人)의 숨결로 배어나온 것은 아닐까.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를 앓은 그녀는 자신의 남편도 장애인이라 했다. 시댁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두 아이를 낳았단다. 그동안 친인척의 왕래도 없이 철저히 외면당한 채 살았다는 그녀. 이제 아이들이 성장하여 처음으로 시댁을 방문한다는 그녀의 눈물은 인내로 빚은 승리의 결정체였다.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을까. 같은 어미로서 그녀가 눈물 흘릴 때 그저 마음으로만 눈물을 닦아줄 뿐이다.

가끔 그녀는 휠체어를 타고 어디론가 외출했다. 알고 보니 그 버거운 몸으로도 봉사를 하러 다닌단다. 어려운 장애청소년들에게 인장(印章)기술을 가르치며 재능기부를 하고,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그들에게 김치를 담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니 그녀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장애를 안고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녀를 보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녀가 지닌 행복을, 참된 평화를 알 것 같았다.

아직도 나는 손때 묻은 낡은 도장을 간직하고 있다. 흐른 세월만큼 찍힌 흔적도 많다.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만기된 적금통장을 찾으러갈 때, 마음에 드는 내 집을 장만했을 때, 등등. 그런 날은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마음은 얼마나 설렜는지…. 이 모든 결과는 결코 아픔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리라.

돌아보니 밥벌이에 지쳐 울던 날도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팽개치고 싶은 날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번번이 손님을 대할 때마다 내 처지가 구차하단 생각에 좌절하기 일쑤였고 때론 과거의 집착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힘겹던 삶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도, 상속분을 포기하고 도장을 찍을 수 있는 것도, 그녀가 지닌 마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완성되는 조각품이 아닐까. 나는 생이 끝날 때까지 버릴 건 무엇이며 새길 것은 무엇인지 도장을 바라보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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