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4.12.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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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다섯 달 만이다. 

매주 산에 갔던 그녀와 말다툼 끝에 잊고 산 것이, 아니 잊으려 애쓰며 산 것이. 

오늘 노을이 지는 저편에서 바람이 불었다. 문득 바람에 실려 그녀가 가슴 속으로 다가왔다.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오늘 뭐해?” 백오십 여일을 징검다리 넘듯 껑충 건너뛰어 그녀에게 목소리를 보낸다. “어쩐 일로 나한테 연락을 했어?” 짐짓 반가움이 뭍어나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한다. “하면 안돼?” 난 퉁명스럽게 그녀의 말을 받는다. 수화기 속의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답한다. “응~ 너무 기특해서!” 수화기 속 그녀의 음성이 반갑게 나풀거린다. “언니 집 앞이야 나와” 

그녀가 저녁노을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노을 속으로 들어와 바람 부는 저녁의 풍경이 되어버린 그녀를 차에 태우고 연극을 보러 갔다. 다섯 달 만이지만 어제 만난 것처럼 우리는 나란히 연극을 보았다. 

일제 강점기에 이리저리 덧씌워진 상황에 의해 북간도로 이주되어 간 후,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진 채 그리움을 안고 평생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수 십 년의 세월을 돌아 고향에 돌아왔으나 지난 시절의 사람들은 이미 떠나버린 상황이고 산천도 이미 변해버렸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피해자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실향민들의 애환이 그려진 연극이다. 

그녀가 운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난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음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 생각해 본다. 세월을 돌아서 와도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사람들의 가슴 저림을 생각해 본다. 만날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상황인지 생각해 본다.

다섯 달 전 해질 무렵, 그녀가 약속시간에 늦었다. 세 번째 늦는 날 나는 그녀에게 이제 내 시간을 공유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었다. 매주 산에 같이 갔었고 우린 종종 저녁에 만나곤 했었다. 토요일 오전 도란도란 산에 오르고, 점심으로 청국장을 먹고 내려오며 그녀와 나는 소소한 일상과 주변의 잔잔한 자연을 함께 느끼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그녀에게 앞으로는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지 말자고 했었다. 벌써 세 번째 늦는 것이라며 그녀를 질타했었다. 그녀는 토끼처럼 눈을 뜨며 내게 말했다. “넌 너무 빡빡해~” 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막아버렸다. 다섯 달 동안 생각해 보았다. 너무 빡빡하다는 말과 ‘미생지신(尾生之信)’이란 고사성어를.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융통성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배려하며 사는 시각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며. 조금만 내가 생각을 달리하면 다른 사람도 마음이 편안한 것을, 모 아니면 도라고 빡빡거리며 산 것은 내공이 부족한 탓이리라.

나의 고지식함 때문에 잃을 뻔 했던 예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어 좋다. 그리고 내 의지대로 내 인생을 영위할 수 있는 오늘이 너무 좋다. 문득 죽은 시인의 사회의 대사가 떠오른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 오늘을 잡아라.’ 일본의 속담처럼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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