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찻집에서
초겨울 찻집에서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4.11.3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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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노랗던 은행나무 가로수는 어느덧 고운 잎사귀를 다 떨구었다. 잿빛 가지만 앙상하게 남긴 채 초겨울 하늘을 묵묵히 바라본다. 차창으로 달려드는 겨울 산은 잔가지들이 서로 엉킨 채 무채색의 모습으로 저무는 세모를 기다린다. 

승용차에서 내린다. 높은 산 가늘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그림보다 더 고운 겨울 하늘이 가을처럼 펼쳐진다. 금방이라도 파란 물이 쏟아질 듯이 고운 하늘, 맑은 바람, 맑은 공기, 눈이 시리도록 파란 겨울 하늘을 보며 찻집 풍경소리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 고향집 같은 흙벽과 남녘으로 창이 난 토담집, 밖에서 본 허름한 모습과는 달리 찻집은 세월의 손때 묻은 소품들이 여기저기 정겨움을 더해준다. 잔잔하게 흐르는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은 이곳에 머문 사람들에게 어수선한 마음을 차분히 보듬어 준다.

작은 창으로 길게 드리운 겨울 햇살, 산 위로 보이는 파란 겨울 하늘, 화려한 옷을 벗은 겨울나무는 산마을의 고요함을 더 선명히 조명한다. 주문한 대추차의 구수한 내음과 어렸을 때 간식으로 먹었던 볶은 콩이 큰 통나무를 갈라 만든 탁자 위에 오른다. 고향집 같다.

토담집 작은 창으로 비치는 겨울 햇살에 깍지 낀 두 손을 모은다. 따뜻하다. 나목(木)의 가지만 묵묵히 버티고 있는 산자락이 내 눈과 만난다. 오고 간 계절을 생각한다. 분주한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 안식을 찾는 숲, 이따금 들리는 산새 소리에 마음은 더 맑아진다.

찻집 남쪽 개울가 언덕 위에 낡고 초라한 집이 보인다. 참숯 굽는 집이란다. 얄푸른 연기가 맑은 새소리 들리는 숲에 처연히 피어오른다. 마치 임을 여읜 소복(素服)한 여인네처럼…. 도회지의 매연과는 다른 깨끗한 연기가 마치 결 고운 비단폭 같다. 잠시 지금은 사라진 고향 생각에 잠긴다. 고향은 늘 포근한 어머니 품안 같다. 어찌 그리 정겹게만 느껴질까? 

겨울이 시작되면 안방 아랫목에 작은 담요를 깔아놓고 질화로엔 잿불을 담아 인두로 다독이며 그렇게 겨울을 보냈다. 어머니는 따끈해진 인두로 동정을 다리며 바느질을 하셨다. 호롱불을 중심으로 기나긴 겨울밤, 우리는 담요 아래 모두 발을 들여놓고 발장난도 하고 웃음꽃을 피우며 따뜻한 정을 키웠다. 그 옆에서 아버지는 가마니 짤 때 쓸 새끼도 꼬셨다. 그때를 돌아보면 우리들의 삶이 참 많이 윤택해졌다. 그러나 마음은 그때 같지 않고 어느 한 곳이 채워지지 않은 갈증을 느낀다. 찾아갈 고향도 모두 아파트로 변하여 아쉬움만 남는다.

“선생님 차 식어요?” 함께 간 지인이 말문을 연다. 연기를 보고 있는 동안 대추차가 다 식었다. 멍하니 찻집 창밖의 풍경에 취하여 차 식는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냈다. 참 오랜만에 초겨울의 풍경 속에 있는 동안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아쉬움을 남기며 그곳을 나왔다.

눈 내릴 때 다시 오고픈 찻집, 아쉬움을 남긴 채 초겨울의 정취를 마음껏 마시며.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숯 굽는 집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다. 돌돌돌…. 언덕 아래 도랑엔 맑은 초겨울이, 그리고 잎이 진 빨갛게 익은 들장미 열매에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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