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함께하는 그대
먼 길을 함께하는 그대
  • 김혜식(수필가)
  • 승인 2014.11.0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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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의 가요따라 세태따라
김혜식(수필가)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 노부부가 서로 손을 잡고 한적한 길을 가고 있다. 바람에 실려 온 낙엽이 팔랑개비처럼 뱅글뱅글 돌다가 이들이 지나간 길 위로 뒹군다. 영화에서나 봄 직한 멋진 장면이다.

나는 만추(晩秋)의 계절이 되면 신열을 앓는다. 그러나 손을 꼭 잡고 한적한 길을 가고 있던 그날 노부부의 환상을 화폭 위에 그리듯 곱씹어 보고 나면 신열이 조금은 식어간다.

며칠 후 얼마 전 보았던 노부부가 아파트 근처 호숫가 벤치에 앉아 홍시를 나누어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을 목격했다. 이때 조지 엘리엇의 ‘두 영혼이 영원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하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위로하며 최후의 순간에도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사랑을 지켜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으리’라던 말이 백발부부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에서 요즘 증가하고 있다는 황혼 이혼 소식에 왠지 마음이 우울해졌다. 황혼 이혼은 젊음의 이혼과 달리 부부지간에 더 큰 부담을 주는 게 아닌가. 황혼은 인생의 벼랑길과 같다. 황혼은 쇠퇴하여 종말에 이름을 뜻한다. 부부가 동석하고 살아도 외롭고 서글픈 게 늙음이다. 활동과 경제력 상실로 인생의 황혼기는 그야말로 쓸쓸하다. 오죽하면 효자 열명보다 악처 하나가 낫다고 했을까.

조지 엘리엇의 남녀의 결혼에 대한 주장이 아니어도 결혼 생활은 장밋빛 환상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가노라면 온갖 희비와 모순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부의 협력이 요구된다. 실패와 좌절의 수렁에 빠질 때마다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배우자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가. 이즈막 김광석이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심금을 울린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넥타이를 매어주던 때/어렴풋이 생각나오/여보 그때를 기억하오/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들/어렴풋이 생각나오<중략>/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세월을 엮어가며 미운 정 고운 정 쌓아 왔기에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했다. 민낯을 보일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 부부지간이거늘 한 이불 속에서 운우지정을 나누며, 장점보다 단점을 감싸며 살아왔기에 이제 옛 추억을 보약으로 마셔가며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아내가 죽으면 마당 한가운데 관을 놓고 남편이 꾸벅꾸벅 절을 하며 곡(哭)을 하던 부부의 연이 어쩌다가 헤어지고 만나는 아이들 장난처럼 되었단 말인가.

내일 아침 해 뜨거든 배우자의 거칠어진 손을 다정히 잡고 산책 한번 나가보는 것도 늘그막의 은은한 애정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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