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41>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41>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0.1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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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천주교회

신 준 수 <객원기자>

100년 믿음의 역사 담은 구원과 희망의 소리 '댕그랑'

▲ 2002년 3월 등록문화재 7호로 지정된 옥천성당 건물. 성당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옥천천주교회는 충북도내에서 음성 감곡성당(1896)에 이어 두 번째로 1906년 5월 20일 건립된 청주교구 옥천본당(주임신부 곽동철)은 우리나라 가톨릭 건축역사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1903년부터 공소(신부가 상주하지않는 예배소)로 설립된 옥천천주교회는 1906년 옥천본당이 들어선 뒤 1909년 구읍 죽향리에 성당을 신축했다가, 읍소재지가 생기면서 논의 끝에 1948년 삼양리로 이전했다. 원래 성당 자리는 일제시대 때 신사(神社)가 있던 자리였다. 교회 초창기 시계가 많지 않던 시절 옥천지역에 울려퍼지는 성당 삼종소리는 옥천지역의 시계 역할을 했고, 신도들은 그 종소리에 맞춰 언제 어느곳에 있든 삼종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특히 몸이 아픈 사람들이나 심경에 고통이 있는 사람들은 성당 종소리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 옥천성당 초창기 모습.

옥천 읍내로 울려 퍼져나가는 옥천 성당 종소리는 사랑과 화해 위안과 용서의 종소리이다.

지난 5월 '희년'을 맞아 100주년 감사미사와 더불어 시신기증 운동, 기념 사업으로 불우 100가정 돕기 운동을 실시한 옥천천주교회는 우리 나라에 서양 문물이 처음 들어온 개화기 이후의 건축물로 보존할 가치가 인정돼 지난 2002년 3월 등록문화재 7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가톨릭에서 '희년'이란 '복된 해', '성스러운 해'라는 뜻을 지닌 성경 용어다. 2000년은 로마 교황청이 선포한 대희년이었고, 그 때 옥천성당은 대희년 순례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야트막한 언덕위 하늘색 건물외벽이 가을하늘처럼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단정하게 정리된 마당과 종탑을 낀 중국풍 기와지붕은 성당 100년 역사를 뒤돌아보게 한다.

옥천지방의 천주교 전래는 1883년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가 옥천과 가까운 영동군 고자동(현, 상촌면 고자리)과 공수동(현, 양강면 지촌리)에 전교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감곡본당 부이용 신부에 의해 본격 전교활동

1886년 로베르 신부가 경상도지역의 전교책임을 맡고 대구로 부임한 후, 1900년을 전후하여 감곡본당의 부이용(R. Camillus Bouillon, 任加彌) 신부에 의해 옥천지역의 본격적인 전교활동이 펼쳐졌다.

옥천천주교회는 1906년 5월 20일, 공주본당에서 분리되어 옥천읍 이문동(현, 문정리) 43번지에 본당을 설립하였다.

한국인 사제인 홍병철(洪秉喆) 루가 신부가 초대 신부로 부임하였으며, 1909년 5월 30일에는 본당을 죽동(현, 죽향리) 154번지로 신축 이전하였다. 1914년 11월 12일에는 관할하던 비룡 및 대전 공소(公所)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1928년에 본당으로 환원되었고, 1943년에 다시 공소가 되었으나 1948년 본당으로 환원되면서 같은 해 7월, 현 위치에 한식 목조성당을 신축, 이전하였다.

1955년 9월 8일 현 성당건물 신축

1953년 9월 충북지방이 메리놀외방전교회의 전교지역이 되면서 옥천본당의 변화가 가속되는 가운데 1955년 9월 8일 현 성당건물이 신축되었다. 현재 지붕 상량문에 건축연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의 성당건물 지붕은 왕대공형식이 변형된 목재 삼각형 지붕틀 구조를 하고 있다. 대지 남측면에 서남향으로 길게 놓여, 성당 우측면을 따라 급경사의 주진입로를 시계방향으로 감아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이 건물은 길이 47.9m, 폭 28.8m(익랑 포함)의 장방형으로, 최고높이 21.5m(종탑십자가 포함), 지붕높이는 9.3m이다.

현관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좌우대칭형이나 신축당시 조성된 측면 부출입구, 증축부의 출입구 및 창호, 그리고 내부 실의 구획 등에서 대칭구도가 일부 변형되었다.

전면에 3개의 박공형 지붕을 씌운 전실(narthex)을 두고, 중앙부에 3층 규모의 종탑이 있다. 내부는 비교적 넓은 폭을 기둥없이 예배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돼 있으며, 각 칸(bay)마다 1~2개의 긴 아치형 창 또는 출입구가 나 있다.

증축부의 좌측은 유아실과 전시실, 우측은 고해성사실과 업무실, 후면부는 제의실과 성단으로 구성돼 있다.

건축 이후, 두 차례의 큰 변화과정을 겪은 이 성당은 12대 하 빈첸시오(Vincent Hoffman) 신부의 재임(1963년7월15~1967년10월1일)시절, 종탑부의 부식된 함석 마감을 기와로 변경하면서 4면의 환기창과 십자가형 첨탑(尖塔, pinacle)이 철거되었다. 두 번째는 1991년도에 실시된 성당 증축공사로 기존의 일자형 평면 좌우와 후면에 각각 익랑(翼廊, trancept)과 제대부(apse)를 추가하면서 긴 십자가형(latin cross)으로 평면이 바뀌었다.

백(Ralph Deblanc) 수사로 추정되는 설계자는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공학도로 그가 청주교구에서 활동하던 기간(1945~89)동안 옥천성당의 건축이 진행되었다는 점이 이부 신자들의 증언이다. 신자들에 따르면 성당건축과 관련하여 당시 주임신부였던 변 로이(Petipren Roy, 邊聖行) 신부가 백 수사에게 설계를 의뢰했었다고 증언하고 있어 그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지난 5월 '희년'을 맞은 옥천천주교회 건물은 지방에 남아 있는 근대문화유산이라는 희소적 가치와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종교건축변화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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