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의 눈물만이 겨울을 녹인다
모성의 눈물만이 겨울을 녹인다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4.10.2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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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영숙 <시인>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픈 걸까. 몸이 아파서 마음이 아픈 걸까. 이야기도 시도될 수 없는 것들이 온몸 가득 몸살처럼 끓는다. 

한 때는 숨을 누르는 환경과 제도에 회의하며 스스로를 냉기 도는 골방 속에 가두고 딸 꾹질처럼 울던 때가 있었다. 원인도 모르는 고독에 빠져 창문을 스치고 지나가는 달빛에도 눈물을 걸던 처연한 일들이 지금 생각하면 실존적 사유였을까? 언젠가는 물질로 돌아가야 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두려움과 우주 밖 시원의 무지에서 오는 형이상학적 공포에 짓눌리던 그때가 한참 철학적 사유와 시심이 촉발하던 때였던 것 같다. 

지금은 생의 단단한 밥상을 이고가야 할 도시의 아낙일 뿐, 무덤가 풀씨 하나에도 철학을 걸던 젊은 날의 심지는 육체적 허기를 해결할 밥솥에서 밥물처럼 끓어오를 뿐이다. 

그동안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며 아이들 키우는 아낙으로 사노라 잊었던 고정희 시인, 때마침 한 단체에서 기획한 가을문학기행 프로그램에 그의 생가 일정이 있어 편승했다. 십여 년 전 고정희 시의 페미니즘 양상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한때 그의 시 세계에 함몰된 적이 있다. 삶의 멘토처럼 다가와 고답한 정신세계를 질타하던 시인의 정신을 되새기면서 책꽂이 귀퉁이에서 숨죽인 채 포복해있는 논문과 시집들을 꺼내 읽고 발표할 답사 자료를 만들었다. 

한국의 체게바라를 떠올리는, 7,80년대 민주 혁명 전사인 김남주와 여성해방 출사표로 우주공동체적 수평 세상을 부르짖던 고정희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 우리나라의 끝자락에 위치한 해남 땅, 강강술래를 연상케 하는 월출산과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듯 맞닿은 백포리 줄기를 따라가면 고향집처럼 보인다.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거니는 동안 김남주와 고정희로 닮아가는 걸 보면 환경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모두 넉넉한 문인의 감성이 되는 가을은 그 풍경 자체로 시가 된다. 모두들 정의의 사도가 되고 혁명 전사가 되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태생적 악인은 없는 것 같다.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며 식구들의 밥그릇 채우기에 여념 없는 도시의 아낙이 무슨 재주로 부정과 씨름하며 거대담론을 논하던 전사들을 운운할 수 있을까. 정의를 외치며 이 땅의 불씨 하나 덩그마니 던져놓고 별똥별처럼 사라진 그들의 심지를 시밭과 행적에서 살피는 동안 고막이 터지고 숨이 멎는 듯했다.

제대로 된 문학관 하나 없이 쓸쓸한 해남 땅에 고즈넉이 자리한 고정희 시인의 생가, 김남주 문학관 건립은 계획 중에 있지만, 고정희는 아직도 요원하다. 페미니즘 시인이라는 지배 담론에 결박되어 그 가치 또한 조명되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자본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에서 무슨 재주로 전기 솥에 세상을 안쳐내며 포르말린 가득한 전쟁터를 뜸들일 수 있을까. 지상의 욕심 하나 줄이면 고정희 시인이 말하는 모성의 눈물비 만들 수 있으려나.

‘치~직’ 소리를 내며 밥솥에서 저녁밥이 뜸 들고 있다. 아직도 우리가 사는 세상엔 살림의 밥상을 차려 고봉밥을 먹여야 할 가난한 이웃이 많다. 철갑처럼 옹골진 가난을 뚫지 못해 구두 뒷굽처럼 낡아 신음하는 노동이 묵은 빨래처럼 지천이다. 고정희 시인이 말하는 생명과 살림과 대지의 젖줄로 상징되는 모성의 눈물만이 이 땅의 지독한 겨울을 녹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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