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넷, 하늘 그물은 성글지만
일흔넷, 하늘 그물은 성글지만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4.10.23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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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勇於敢則殺(용어감즉살)이요 勇於不敢則活(용어불감즉활)인데 此兩者(차양자)는 或利或害(혹리혹해)나 天之所惡(천지소오)인데 孰之其故(숙지기고)인가 是以(시이)로 聖人(성인)이 猶難之(유난지)니라.

天之道(천지도)는 不爭而善勝(부쟁이선승)하고 不言而善應(불언이선응)하며 不召而自來(불소이자래)하며 ?然而善謀(천연이선모)니라.

天網(천망)은 恢恢(회회)하나 疎而不失(소이부실)이니라.

- 날래면서 무모한 것은 죽이는 기운이요, 날래면서 신중하면 살리는 기운이다. 이 둘은 하나는 이롭게 보이고 하나는 해롭게 보이지만 하늘이 꺼리는 것을 누가 그 까닭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제대로 사는 이도 쉽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하늘의 일은 다투지 않고 이기며 말하지 않아도 듣고 부르지 않아도 절로 오며 너그러워 덤비지 않아도 잘 모으는 것,/ 하늘 그물은 성글고 성글어 다 빠져나갈 것 같지만 놓치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



= 도덕경 쓰기를 시작하면서 ‘감히’ 이 시도를 한다고 하면서 그 敢(감)을 ‘무모함’이라고 풀었는데, 바로 이 본문에 나오는 것을 그 근거로 한 것이었다는 말을 이제야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날래고 힘이 있을 때 무모하면 그 기운은 죽이는 힘을 지니게 되지만, 그렇지 않고 신중하다면 살리는 데 보탬이 된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두 기운이 하나는 이로움으로, 다른 하나는 해로움으로 작용하지만 하늘은 그것을 거절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삶에는 勇於不敢(용어불감), 즉 힘이 있되 무모하지 않고 신중하면 넉넉한 인품이 되지만, 천품은 아예 勇(용)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도덕경 전체를 흐르고 있는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의 철학을 한 마디로 나타내는 구절이라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이하 하늘의 길은 이러저러 하다는 것은 똑같은 글귀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도덕경 전체에 수없이 반복되는 내용이니,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듯 합니다. 그 다음의 구절, 하늘 그물은 성글고 성글어 모든 것이 다 새어나갈 것 같지만, 놓치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는 것, 이것은 勇(용)이 능력이긴 하지만, 그런 능력으로도 모자라거나 놓치는 것이 있다는 것, 그런 능력을 넘어선 지극한 평범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을 이루는 길이라는 말을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3장에서 플라톤을 비판한 것이 있는데, 탁월함을 기반과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는 플라톤의 철학을 도덕경에 견줘서 읽으면 勇於不敢(용어불감)의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오늘날 문명세계가 드러내고 있는 문제와 한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서 나오게 되는 갖가지 모순과 부작용이 오늘날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고, 생태계의 위기로 나타나기도 했다는 것, 탁월함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무리 갈고 닦아도 한계와 모순을 자체 내에 지니고 있다는 것까지 갈파한 옛늙은이의 눈길은 그야말로 玄妙(현묘) 그 자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해가 뜨고 새들이 재잘대며 하루가 열리는데, 그 하루를 여는 기운은 결코 남보다 우월한 어떤 기운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며 그저 고마워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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