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창으로도 세상이 보인다
작은 창으로도 세상이 보인다
  •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 승인 2014.10.1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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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스크래치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항구적인 어떤 것이다. 

- 루소가 비엔 호숫가를 거닐며 행복했던 순간 -

요즘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평온해 보인다. 들뜬 꽃잎처럼 어수선했던 이야기도 시간 속으로 수그러지고, 단풍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계절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겠지만 떠도는 타인의 개인사에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다. 당사자들의 생각이나 의도와는 달리 왜곡되어 전달되는 이야기는 우리의 고질병이다. 무성하게 떠도는 소문을 꼬리 잡아 단풍보다 더 붉은 얼굴로 열변을 토하는 사람을 보면 산으로 보내고 싶다.

우리 이제 자연을 바라보는 것처럼 인간사도 그냥 세상 엿보기, 바라보기, 지켜보기로 하면 안 될까? 왜 사람들은 자기와 무관한 타인의 일에 참견하고 간섭하며 촉각을 세울까? 나약한 인간이니까? 짧은 인생에 소인배들의 언행을 지켜보는 시간조차도 아깝다. 이제 마음을 활짝 열고 `정의'란 단어를 깊이 새기며 물 쓰듯이 세상에 인심 좀 쓰면 안될까? 우리는 허튼 소리하면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한다.

오랜만에 김밥을 말았다. 김밥이 옆구리 터지지 않게 자책과 자숙하며 사랑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김은 자칫하면 쉽게 찢어진다. 우리의 마음과 같아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 오랜만이라는 건 굳이 내가 손수 김밥을 말지 않아도 쉽게 먹을 수 있는 김밥천국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쁜 현대인에게 김밥천국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숙련된 기술자들이 만들어낸 김밥을 많이 먹어서인지 현대인들은 터져 나와야 할 소리를 권모술수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

올봄에 가기로 한 막둥이의 수학여행이 세월호 사건으로 연기되어 이제야 떠났다.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이지만 셋째는 참 무던하다. 배만 고프지 않으면 환한 미소를 늘 달고 다닌다. 소풍날 김밥집에서 파는 김밥을 사 보내는 일이 다반사인데도 그저 만족해했다. 그런 아들이 이번 수학여행 가기 전날 “엄마 나 김밥집 김밥 너무 짜서 먹기 힘들어요” 한다.

당연히 이번 수학여행에도 사서 보내려고 했는데 아들 말에 갑자기 머리를 “띵” 해졌다. 아차, 싶어 늦은 시간 부랴부랴 슈퍼에서 김밥 재료를 사와 이른 아침에 김밥을 말았다. 김을 깔고 사랑의 눈빛 한 번 던지고, 밥을 펴고 사랑 한 줌 넣고, 단무지, 시금치, 우엉조림, 당근볶음, 맛살, 계란부침, 햄 넣고 터지지 않게 꼭꼭 챙겨 김밥을 싸 보냈다. 

아이가 떠난 자리에 뭉클한 사랑이 남아 있다. “우리 엄마 김밥 짱이야.” 사랑도 가끔 확인이 필요하다. 아들은 나에게 ‘우리 엄마 최고야’ 하고 인증 도장을 하나 꾹 찍어줬다. 사랑은 아주 작은 것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이 타인의 단점을 거론하며 나보고 조심하라고 김밥 옆구리 터진 소리를 했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전달하는 사람을 조심한다. 소문은 상대가 자기의 말에 동조하지 않거나 부러울 때 상대의 험담을 타인에게 알리면서 시작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청자는 무슨 신나는 이야기인 양 본질을 상실한 채 부풀여 타인에게 전달한다. 나는 누가 타인의 험담을 나에게 얘기하면 전달하는 이가 밉다. 험담에는 남을 배려하거나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넘치는 사랑으로 가득하기에 험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둘 공간이 없다. 오늘도 창으로 부서지는 햇살이 눈부시고 단풍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 평온한 세상에 누가 초를 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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