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보무사 <192>
궁보무사 <192>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0.1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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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이를 우리집 며느리로 받아들여라"
12. 쫓기듯이 달리는 자

'세상에 이렇게 분하고 억울할 데가! 내가 아주 힘들게 확실한 그 구멍을 찾아내 놓고도 지금 이런 개망신을 당하다니.'

그러나 이를 어찌할 것인가! 처녀는 자기가 직접 당해놓고도 전혀 안 당한 것처럼 저렇게 길길이 날뛰며 악착같이 바득바득 우기고 있고, 그녀의 몸종은 자신이 확실하게 당했다며 자복을 하고 있으니.

양청은 주위를 열심히 살펴보았지만 지금 이곳에 자기 입장을 이해해 줄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 뻔뻔스럽게 구는 이웃집 처녀와 그녀가 하는 말만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려는 그녀의 부모, 그리고 자기가 모시는 아씨를 위해서는 죽음이라도 기꺼이 불사할 것만 같은 여종과 충직한 그 집 집하인들 뿐이니 양청으로서는 미치고 환장을 할 지경이었다.

결국 양청은 즉사하게 매는 매대로 얻어맞고 개망신은 개망신을 당한 채 못생긴 이웃집 여종을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매겨서 가지고 오는 조건으로 그 일을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으음! 분하다! 억울하다. 대체 내가 이게 무슨 꼴이야.'

양청은 자기 부모님 뵐 면목이 없음은 물론 팔결성 내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웃어 주는 것만 같아 도무지 낯짝을 들고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양청은 어느 날, 팔결성을 몰래 빠져나와 저 멀리 딴 지방으로 갔다. 다행히 그는 좋은 사부를 만나 그를 따라다니며 약초도 캐고 의술(醫術)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러길 십여 년 만에 양청은 어디 가서 혼자 충분히 의원 노릇을 할 만한 실력을 쌓아가지고 팔결성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로 오래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양청을 반겨준 사람이라곤 거의 허물어져가는 움막집 안에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렵게 된 병든 노모(老母)와 그때 그 못생긴 이웃집 여종뿐이었다. 그가 팔결성을 도망치듯 몰래 빠져나간 뒤, 그의 아버지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과 헤어지게 되었다며 거의 매일 곤죽이 되도록 술을 퍼마셨고 이로 말미암아 건강을 크게 해쳐 결국 죽고 말았고, 그의 어머니마저 시름시름 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결국 지금 이런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돌아온 양청은 그간 배워온 의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병든 자기 어머니는 물론 팔결성 내에서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말끔히 고쳐주어 사람들로부터 크나큰 칭송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재물도 제법 짭짤하게 벌어들이기 시작하여 불과 몇 달도 안 되어 옛날에 팔아치웠던 집까지 모두 다시 사들였다. 그런데 그의 노모는 노환(老患)으로 세상을 영영 떠나게 될 때에, 아들 양청을 불러놓고 그의 두 손을 꼭 잡아 쥐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얘야! 저 아이(여종)를 절대로 미워하지 마라. 저 애한테 무슨 죄가 있겠니 돌아가신 너의 아버지가 몸이 아파 꼼짝도 못하셨을 때, 그리고 우리 집 가산을 몽땅 탕진하고 내가 병석에 끙끙 앓아 누워있을 때에도 저 아이는 싫은 기색 내지 않고 군소리 하나 없이 온갖 병수발을 다해주던 고마운 아이란다. 저 아이가 언짢게 생기긴 했다만 그러나 우리 집안을 위하는 마음씨 하나만큼은 비단결처럼 너무 곱단다. 그러니 너는 저 아이를 우리집 며느리로 받아들여라. 이 어미의 마지막 소원이자 돌아가신 네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이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양청은 땅을 치며 몹시 애통해 했다. 그 후 양청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린다는 구실로 그 못생긴 여종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것은 딴 데로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는 그 이웃집 처녀에 대한 양청 나름대로의 복수극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팔결성 사람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크게 축하해 주었고, 팔결성주는 양청이 그간 행하였던 일을 높이 평가하여 이제는 그의 정식 마누라가 된 여종의 신분을 귀부인 격으로 상승시켜 주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별별 희한한 일을 다 겪게 되듯이, 그 후 양청에게는 전혀 뜻하지 않은 일이 찾아오고야 말았으니.

그때 젊은 양청의 가슴에 심한 못질을 해대고는 딴 데로 시집을 갔었던 바로 그 이웃집 처녀가 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그만 뭐가 잘못 되었는지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그 처녀는, 아니 이제는 어느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린 그 여자는 모진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기가 과거 양청에게 저질렀던 일을 부끄럽고 죄스럽게 생각했음인지 주위 사람들에게 의원 양청을 절대로 불러오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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