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적산 달맞이
원적산 달맞이
  •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 승인 2014.09.14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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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스크래치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원적산의 달은 참 크고 밝다. 그 산 위에 뜬 달을 생각하면 내 머릿속에서 둥그런 달이 먼저 부풀어 오른다. 전설 같은 태몽이야기를 담고 있는 원적산은 시댁 마당에 서면 정면으로 보인다. 결혼한 이래 나는 시댁을 방문할 때마다 으레 산과 마주 보며 묵언의 대화를 나눈다.

시댁과의 관계를 완만하게 해 나가라고 추석이 되면 더 크게 뜬다. 송편을 빚고 밖으로 나오면 검푸른 밤바다에 원적산 위 둥그런 달이 소목재를 훤하게 비춘다. 마치 불을 밝혀 놓았으니 얼렁 나오라는 듯이 말이다. 어머님은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목재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엮어내신다. 나는 소목재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지만, 밭둑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슬쩍 빠져나온다.

집안에서 일어난 불편한 일들도 밭둑길을 걷다 보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달빛과 풀벌레 소리에 동요되어 콧노래를 부르게 된다. 올해 추석도 밭둑길을 걸었다. 흐린 날씨로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상수리나무 사이를 지나 벼 이삭을 흔들며 오는 바람과 풀벌레 소리에 장단 맞추며 한밤을 즐겼다.

명절 때 고향, 귀성길이란 말은 참 정겨운데 결혼한 여자에게는 이러한 말들이 잠시 덜컹거리게 한다. 조상들이 가족·친지간의 우애를 미덕으로 삶았던 명절이 언제부터인가 현대인 소수에게는 다소 불편함을 초래하기도 한다. 우애 좋은 집안의 형제들은 반색하며 달려가는 귀성길이겠지만,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명절이 마치 수용소로 끌려가는 기분일 게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한가위란 명절이 우리에게 크게 자리하고 있어 고향을 떠나 사는 이들의 발길을 훈훈하게 한다.

명절이란 우리 민족에게는 참 값지고 고귀한 문화인데 현대인에게서 점점 소원해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과학문명이 빗어낸 인간관계 상실증 중 하나이다.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인 얄팍한 어른들의 이해타산이 어쩌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진정지켜야 할 소중함을 잊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 추석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걸 보면 어른들이 보여주는 일상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비중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골 출신인 나는 어릴 적 추석 한 달 전부터 객지에서 생활하는 삼촌과 친지, 나와는 상관없는 이웃사람들까지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동네 사람들은 추석맞이로 집집이 집안과 동네 길을 손보며 추석맞이에 분주했다. 명절 때만 되면 조용하던 시골 마을이 시끌벅적한 게 사람 사는 맛이 났다.

특히 나는 셋째 삼촌이 사 가지고 오는 새 옷을 많이 기다렸다. 삼촌은 새 옷과 새 신발로 칙칙한 시골뜨기 나를 훤하게 만들었다. 나는 새 옷과 새 신발을 신고 우직골에서부터 천방까지 폴짝폴짝 뛰며 하루에도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른다.

새 옷도 새 신발도 사람들도 그리 반가울 게 없는 요즘, 어렸을 때 추억이 크게 남아 있는 걸 보니 어린 시절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견문을 넓힌다고 명절에도 아이들 데리고 해외 여행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해외여행도 좋지만, 명절에는 발길을 친척 집으로 옮겨 보는 것을 어떨까? 이번 기회에 나도 아이들 데리고 가까운 친지들을 찾아 인사라도 시켜야겠다.

육거리시장에서 장보기한 물건으로 명절을 쇠고 내려오는 길 어제 숨어 있었던 원적산의 달이 길을 밝히며 청주까지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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