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아홉, 配天(배천)으로서의 존재가치
예순아홉, 配天(배천)으로서의 존재가치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4.09.11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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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善爲士者(선위사자)는 不武(불무)하고, 善戰者(선전자)는 不怒(불노)하며 善勝敵者(선승적자)는 不與(불여)하고 善用人者(선용인자)는 爲之下(위지하)하니 是謂不爭之德(시위부쟁지덕)이요 是謂用人之力(용인지력)이라.

是謂配天(시위배천)이니 古之極(고지극)이니라.

- 제대로 된 장수는 무력을 쓰지 않고 제대로 싸우는 이는 분노하지 않으며 제대로 적을 이기는 이는 더불어 싸우지 않고 제대로 사람을 쓰는 이는 늘 아래에 머무니 이를 일러 다투지 않는 됨됨이요 또한 사람을 쓸 줄 아는 힘이니, 이를 일러 하늘의 배필이라 하는데 옛 가르침의 궁극이다.

 

여기에는 생략된 두 글자가 있다고 보고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는 不與(불여) 뒤에 爭(쟁)이 생략된 것이니 不與(불여)를 ‘더불어 다투지 않음’으로 보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古(고)의 뒤에 道(도)가 더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옛 가르침’으로 본 겁니다.

어쨌거나 내가 처음 도덕경을 읽을 때 머리에 반짝이는 별이 부딪친 것 같은 신선함을 주는 말이 있었는데, 바로 配天(배천)이라는 말입니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配(배)라는 말은 저울 이쪽에 어떤 물건을 놓고, 다른 한 쪽에 어떤 것을 올려놓았을 때 저울이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으면 그 둘을 일러 서로 配(배)가 된다는 뜻이 있다는 겁니다. 이 때 天(천)은 당연히 ‘우주’라고 읽는 게 옳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모든 존재의 의미나 무게가 바로 우주와 같다는 것으로 보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처음 들었을 때 나를 두고 배천이라고 부르는 옛늙은이의 작지만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지칭(指稱)을 받았다는 느낌으로부터 오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와 마주 서 있는 그가 누구든, 또는 무엇이든 바로 배천이라는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개별자로서의 의미와 무게, 또는 가치가 바로 배천이라는 데까지 헤아림이 나아가면서 뒤통수부터 울리기 시작하여 온 몸을 흐르는 그 아름다운 전율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무엇 하나라고 하더라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싶은 겁니다. 그럴 때 武(무)는 무엇인가를 발 밑에 두려고 하는 온갖 시도라고 볼 수 있고, 怒(노)는 제 뜻대로 안 된다고 화를 내는 것으로, 그리고 勝敵(승적)은 남의 힘을 빼어 제가 그를 다스리게 된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시도나 의지를 품지 않고 오로지 존경한다는 것이 爲之下(위지하: 기꺼이 자신을 낮춤)에 담겨 있다는 겁니다.

거기서 비로소 모든 것이 배천으로 보인다는 말인데, 그것이 옛 가르침의 궁극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이렇게 볼 줄만 안다면 더는 배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기억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구체적 실천이 없거나, 또는 그 지식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쓴다면 그런 것은 참된 의미에서는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반짝이게 하는 모든 가르침의 궁극인 配天之識(배천지식: 모든 것을 우주만한 무게로 볼 줄 아는 인식)을 좀 가볍게 말한다면 ‘존재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직적, 또는 계급적인 사고가 아니라 수평적인 사고에서 나올 수 있는 이 가르침을 붙잡고 오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우러르기, 그 모든 것 앞에서 절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다면, 삶은 그만큼 그윽해질 것입니다,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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