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마무리
  • 최지연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14.08.27 1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지연 교수의 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교수>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무덥던 여름은 어느새 한풀 꺾였다. 중복과 말복 사이에 있는 입추를 보내면서 복 중에 입추라고 가을은 얼토당토하지도 않다고 되뇌이던 것이 엊그제인데 처서를 넘기더니 이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분다.

참으로 자연의 섭리는 오묘해 절기를 잊지 않는다. 한여름 복 중의 입추가 지나면 농부들은 김장을 갈고 가을을 준비한다. 처서 즈음에는 이제 더 이상 풀이 자라지 않으니 벌초를 하며 산소를 돌본다. 처서였던 지난 주말 벌초 행렬로 고속도로가 몸살을 앓았던 것을 보면 우리의 삶도 절기를 따라 움직임을 알 수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 삶인데 절기를 보고 일기를 예측하고 미리 준비할 일들을 도모하는 시간을 주니 자연의 오묘한 섭리야말로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자리에 발을 들여놓는 입직의 시기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퇴직의 때도 있기 마련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때가 되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가깝다. 교육계에서는 2월 말, 8월 말을 기점으로 정년을 맞는다. 8월 마지막 주 역시 많은 분이 평생 몸담아온 교실과 학교를 떠나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는 때다.

지난 주간 1979년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으로 처음 만난 은사님께서 정년퇴임을 하셨다. 당시 1학년이던 제자는 불혹을 넘긴 중년이 됐고 첫 발령으로 젊던 나의 선생님은 이제 손자 손녀를 둔 할아버지가 되셨다. 오랫동안 늘 그 자리에서 제자의 마음을 받아주셨기에 그 자리를 떠나신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낯설게 다가왔다. 살아보니 인생에는 새로운 시작과 도전에 가슴이 뛰던 날이 있다.

그러나 마흔이 넘고 보니 새로운 시작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기에 선생님의 정년에 무슨 말씀을 해드려야 하나 하고 학교로 찾아뵈었다. 혹여 우울해하지는 않으실지, 눈물이라도 보이실까 외려 내 마음이 요동쳤다.

그러나 어른은 어른이었다. 조직에 매여 있어 못해본 오지 여행을 실컷 하고 싶으시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하셨다. 강원도, 충청도 작은 산골에서 그 동네 분들이 드시는 소박한 음식과 거칠지만 순수한 그분들의 삶을 나누며 진짜 사는 게 뭔지 보고 듣고 경험하고 싶다 하셨다. 은퇴 후 머무르실 집에 나무, 꽃, 채마 밭에 손 갈 곳이 많아 여행 다닐 시간적 여유나 생길지나 모르겠다고 웃으신다. 어리고 젊을 때 살아 내느라 못 배운 기타를 열심히 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을 때는 코끝이 찡했다. 그때 기타 치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하시며 눈을 반짝이시는 선생님을 뵈면서 마흔의 제자는 정말 마흔인데 정년의 선생님은 소년이시구나 싶었다.

아직 정년을 한참 앞둔 눈으로 정년을 보면 여러모로 복된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연령까지 자기 관리가 철저하였기에 건강과 활기를 유지하여 불편함 없이 근무했으니 그것이 첫째 복이요,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들과 인간관계에 충실하고 덕을 쌓았기에 퇴임하는 자리가 외롭지 않으니 그것이 둘째 복이다.

또한 나의 직접적인 잘못이 아니라도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을 만나기도 하고 사고나 여러 어려움으로 직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저런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은 것도 복이요, 인생 100세 시대에 너 늦은 나이가 아닌 건강하고 젊을 때에 새로운 삶을 준비할 기회가 되는 것 역시 복이니 정년을 맞아 퇴직하는 것이야말로 복 중의 복이라 하겠다.

정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첫발을 내딛는 모든 분들이 소년의 마음, 소녀의 마음으로 건강하게 행진하시기를 바란다. ‘정년이 뉘 집 딸 이름이여?’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농을 던지시던 교장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을 떠올리면서 그 호탕함으로 아름다운 시작을 자축하시기를 소망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