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일곱, 도무지 다투지 않는 길이야말로
예순일곱, 도무지 다투지 않는 길이야말로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4.08.2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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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江海(강해)가 所以能爲百谷王者(소이능위백곡왕자)는 以其善下之(이기선하지)니 故(고)로 能爲百谷王(능위백곡왕)이니라.

是以(시이)로 欲上民(욕상민)이면 必以言下之(필이언하지)하고 欲先民(욕선민)이면 必以身後之(필이신후지)니 是以(시이)로 聖人(성인)은 處上而(처상이)나 民不重(민부중)하고 處前而(처전이)나 民不害(민불해)하며 是以(시이)로 天下(천하)가 樂推而(낙추이)나 不厭(불염)하니 以其不爭(이기부쟁)이요 故(고)로 天下(천하)가 莫能與之爭(막능여지쟁)이니라.

 

- 강과 바다가 이처럼 온 골짜기 물의 임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래에 머물기를 잘 하는 까닭이니 그러므로 넉넉히 모든 작은 물들의 임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남의 위에 선다는 것은 늘 자신이 낮은 것을 말해야 하고 남의 앞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몸을 뒤로 빼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러므로 제대로 사는 이는 위에 있다고 하여 아래 있는 사람이 버거워하지 않고, 앞에 있다고 하여 거슬려 하지 않으니, 그러면 온 세상이 즐겨 그를 추천함에도 거리낌이 전혀 없을 터이니 그것은 다투지 않는 까닭, 그러므로 온 세상이 능히 그와 다툴 까닭이 없는 것이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궁극이라는 이 말을 못 알아들을 이는 없을 줄 압니다. 여기서 谷(곡)은 그냥 골짜기가 아니라, 골짜기를 흐르는 자잘한 도랑이나 시내를 이르는 말로 들으면 될 터, 王(왕)이라는 말 또한 굳이 ‘임금’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궁극적으로 이르는 마지막 자리’로 이해를 하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欲上民(욕상민)이면 必以言下之(필이언하지)하고 欲先民(욕선민)이면 必以身後之(필이신후지)를 처세술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欲(욕)을 ‘의도’, 또는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로 볼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때’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물이 흐르고자 해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리면 넉넉히 이런 이해가 가능할 터이고 말입니다.

물이 아래로 흐른다고 하여 그것을 부담스러워할 생명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마침내 강이 되고 바다를 이루는 것을 놓고 거슬려 할 까닭이 없는 것이 그 맥락입니다. 도무지 주장이나 다툼이 없이 모든 것을 품고, 모든 것을 이루는 물의 길, 그렇기 때문에 도랑이나 시내는 이미 드넓은 강과 바다의 품에 있더라는 말입니다.

자잘하게 시비를 가리는 짓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그러는 사람의 지식이나 가치, 또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넓고 크게 보면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이 흐를 때 패인 곳을 보고 왜 패였느냐고 하지 않고, 튀어나온 것이 있다고 하여 왜 그랬느냐고 따지는 법이 없습니다. 패인 곳을 만나면 때가 그곳이 다 찰 때까지 마냥 기다렸다가 다시 넘을 만하게 되었을 때 흐르고, 튀어나온 곳이 있으면 굳이 그것을 거스르려 하지 않고 그냥 슬그머니 돌아가는 여유까지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물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안동의 회룡포나 영월의 한반도 지형은 모두 물의 너그러움이 빚어낸 절경입니다. 도무지 다투지 않아 누구도 그와 다툴 수 없는 물의 성격, 그럼에도 모든 것을 움직이고 살리며 제 길을 또한 그렇게 흐르고 달리는, 부딪친다고 깨어지지 않고, 갈라졌다고 해서 나뉘지 않는 그 길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의 길, 그러고 보니 낮아서 크고 아래에 머물러 넓은 강과 바다야말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큰 스승이 아니겠는가 싶은 겁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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