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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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4.08.2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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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어느 여름날, 온몸으로 무너져 내리는 햇살과 함께 걸었다. 그냥 말없이 그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랗게 펼쳐진 목교를, 잔잔히 흐르는 수변을, 계절 속에서 하늘거리는 풀꽃들 사이를, 또박또박 스쳤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하늘 가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녁노을과 함께 걸었다. 그냥 말없이 그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키를 낮춰 내려다보니 패랭이, 두메고들빼기, 개미취 등 들꽃들이 잔잔히 미소 짓고 있었다. 잠시 들꽃에 넋을 놓고 있는데 어디선가 칡꽃 향기가 스르르 코끝을 자극했다. 보랏빛 칡꽃에는 벌들이 동행하고 있었다. 산비둘기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발길에 차여 고개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물어 가는 들녘엔 노란 달맞이꽃이 지천으로 흔들리고 도라지꽃과 봉숭아꽃 고구마꽃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흔들리는 산기슭의 나리꽃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노을은 나를 스치고 대청호 물빛은 먹빛으로 다가왔다.

밤의 입자를 밟으며 어둠과 함께 걸었다. 그냥 걷다가 그저 고요히 대청호를 내려다보았다. 검게 흐르는 호수 위로 가로등에 반사된 물이 은빛으로 자디잔 빛을 보석처럼 발하고 있었다. 문득 생각에 잠겨 보았다. ‘나는 어쩌다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고 어쩌다가 이런저런 사람들 속에서 어쩌다가 이렇게 흐르는 걸까. 나는 더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나는 잘 흐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걸까.’

새까만 어둠을 타고 옷깃에 스치는 바람과 함께 걸었다. 그냥 걷다가 그저 밤안개처럼 찻집으로 스며들었다. 입안에 스르르 녹을 것 같은 카푸치노 한잔을 시켰다. 찻집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무거운 공기와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나와 함께 했다. 카푸치노를 마시다 창밖을 보았다. 까만 밤하늘이 나를 다 마셔버릴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하늘 사이로 툭툭 튀어나온 별빛 몇 무리가 반짝반짝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호기심을 까만 밤하늘에 남겨둔 채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얼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봤다. 거울 속 그녀도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번졌다. 고요하고 어두워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비로소 내가 보였다. 어두워진 후에야 비로소 내가 환해졌다.

그녀를 데리고 찻집을 나와 그녀와 함께 걸었다. 그냥 말없이 걷다가 그저 조용히 차에 올랐다. 집으로 오는 길에 그녀를 옆자리에 앉혔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눈짓을 했다. 그냥 그것으로 되었다고. 이렇게 함께 밤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고 물빛을 보고 하늘을 보고 카푸치노를 마실 수 있는 것만으로 우리 충분히 행복한 거라고 그녀를 다독였다.

그저 흐르자고 세월이 흐르는 대로 마음이 흐르는 대로 그저 흐르면 그뿐이라고. 잘 살려고도 하지 말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말고 순리대로 사는 거라고 그렇게 사는 거라고 그녀와 난 암묵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이 허락하는 그날까지 나를 떠나지 말고 나도 홀로 그녀를 지키리라고 가슴으로 가슴으로 꾹꾹 말을 삼키며 그렇게 돌아왔다.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아픈 밤이었다. 참 많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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