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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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4.07.24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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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장마철 빨래처럼 눅진한 마음도 함께 실었다. 목적지는 원자력병원이다. 짙푸른 녹색의 산야도, 소박하고 아름다운 들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한숨만 길어진다.

지난 3월부터 불어오는 거센 바람은 한여름인데도 너무 서늘해 자꾸 옷깃을 여미게 한다. 명지바람만 불어온다면 사는 재미는 없겠지만 지금 나를 감싸고 있는 바람은 버티기 힘겹다. 친정아버지께 내려진 짧은 시한부 삶이 그랬다. 그 충격으로 아직도 눈물마를사이 없다. 게다가 학창시절 추억을 함께 공유하고 지금까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삶이 바닥까지 허물어졌다는 소식은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십여 년 전 친구는 잘 전이가 되지 않는다는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었다. 그리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예쁜 암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일년쯤 지나자 자꾸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별것 아니라고 침도 맞고 물리치료만 받았다. 허나 별것 아닌 게 아니었다. 척추에 악성종양이 생겼다. 방심한 사이 갑상선암이 척추로 전이가 된 것이다. 그 후 친구는 수차례 수술을 받으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끌어안고도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늘 웃는 모습을 보여 주는 그녀를 보면서 우리는 안심하곤 했다.

깊은 신앙심으로 인해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남편의 힘이 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친구의 남편은 서울토박이다. 준수한 외모에 말이 없고 크게 웃는 것을 보지 못한 것 같다. 한 직장에서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그의 아내사랑은 닭살이 돋을 정도다. 오랜 시간 투병생활을 하다 보면 경제적인 타격도 심하고 병수발에 지칠 만도 한데 그에겐 오로지 아내만 있었다. 친구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주던 남편의 애틋한 보살핌이었다. 그러던 그가 아내의 마지막 삶의 여정 앞에서 거센 회오리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해 있는 친구의 모습은 눈물을 삼키게 했다. 하체는 이미 마비가 되어 마음대로 움직이질 못했다. “나, 이제 죽으려나 봐.” 내 손을 잡고 친구가 운다. 본래의 모습은 간 곳 없으나 정신은 맑았다. 나는 친구와 마주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두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녀는 피곤하지 않다고 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단다. 남편이 많이 회복되어 며칠에 한 번씩은 찾아오지만 기력이 쇠잔해져 잠깐 있다 바로 돌아간다고 했다. 삶의 끈을 힘겹게 잡고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친구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친정아버지도 그러하리라. 자식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든든한 바람막이는 되지 못할 터이다. 바람에 맞서 흔들리며 숱한 괴로움과 평생 싸워 온 나도 봄부터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이 여름을 지나 가을, 겨울까지 지속될 것 같아 두렵다. 한 줄기 바람이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알 수 없다. 같은 바람이라도 어떤 이는 그 바람을 타고 높이 떠오르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 바람에 휘청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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