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월에
다시 오월에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4.05.0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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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며칠 바람이 불었다. 오월 바람 같지 않은 서늘함에 영산홍 꽃이 우수수 쏟아졌다.

바위틈으로 물처럼 흘러내린 붉은 꽃무리,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꽃잎들이 아이들의 절규 같아 가슴 아린 오월. 아주 오랜만에 몸살 앓는 마음을 추스르고 바깥바람을 쐬러 나섰다. 상처에 새살 돋듯 숲길은 푸른 물이 들어 싱싱하다. 부드러운 바람에는 솔향기 속 간간이 찔레꽃 내음이 묻어온다. 달큰하고 향긋하다. 온 몸의 세포를 열고 크게 심호흡을 해 본다. 살고 싶다. 물길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나무 사이로 비쳐든 햇살로 따스했다.

호수는 송홧가루가 그려놓은 물무늬와 나무 그림자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다. 등산객들이 줄지어 지나갈 때마다 고요하던 호수의 그림이 알록달록 살아나 생기가 돈다. 사람이 한없이 귀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은 사람 냄새가 배어야 아름답다.

휠체어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머리 희끗한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나온 모양이다.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힘에 부치진 않을까 공연히 걱정하는 마음이 든다. 하필 등산로 끝은 경사진 길이 이어지는 구간이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한다. 아들은 능숙하게 휠체어를 반대로 돌린 뒤 어머니 뒷모습을 눈에 담은 채 뒷걸음질로 비탈길을 내려간다.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어머니는 숲을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하고는 쑥쓰러운 듯 옅은 웃음을 지었다. 휠체어는 작은 돌 사이를 부드럽게 피해가며 천천히 내려갔다. 평지에 다다르자 아들은 어머니 모자와 바짓단의 먼지를 털어드렸다. 아들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손길만은 한없이 정성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콧날이 시큰했다.

문득 영화 ‘역린’으로 유명해진 중용 23장이 떠오른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道)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도리 또한 성실하게 지키며 살아가지 않을까. 작은 일도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해나갔다면 세월호 참사같은 불행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속속 드러나는 사고 당시의 진실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뿌리 깊은 부패는 실망을 넘어 절망과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 한편으론 한목소리로 비판을 쏟아내는 우리 또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가 생기면 노력과 정성으로 극복하기보다 인맥을 찾아 부탁하는 것이 당연하고 일상인 듯 여기지 않은 사람 몇이나 있을까. 그런 부패와 원칙 없는 행정이 가능하도록 방관한 우리에게도 책임은 있다. 세상이 정의로워지는 세상은 바로 우리에게서 시작된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런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말이 새삼 가슴을 찌른다. 아울러 세상에 방관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세상은 초록으로 저리 환한데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수 없는, 그리고 그 카네이션을 받을 수 없어 더 아플 유족들을 추모한다. 그리고 살아갈 시간을 생각한다. 매사에 정성을 다하리라. 어제 보고 온 친정엄마가 다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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