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에 취해 붓을 들고, 흥이 일어 글을 짓는다"
"묵에 취해 붓을 들고, 흥이 일어 글을 짓는다"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4.05.06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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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취묵헌 인영선씨 '일중서예상' 대상 수상
42년째 서실 운영 … 독특한 문인화 경지 열어

"세간의 호불호 떠나 좋아하며 즐기면 족해"

고향 천안에서 40여 년 먹에 취해 살아온 취묵헌(醉墨軒) 인영선씨(68·사진)가 최근 큰 상을 받았다. 지난달 24일 한국 서예계의 대가 일중 김충현(1921~2006)을 기려 제정한 ‘일중서예상’ 대상을 네 번째로 수상했다.

취묵헌은 1972년 천안동남구청 인근에 연 서실 ‘이묵서회(以墨書會)’를 지금껏 운영하면서 독특한 경지의 서체를 펼치고 있다. 일중과의 인연은 78년 이묵서회 첫 전시회 때 천안을 찾아 30대 초반의 그를 격려하면서부터다. 당시 일중이 쓴 ‘산고수장(山高水長)’ 휘호가 서실에 걸려있다.

“다른 재주가 없어 한 길로 글씨나 쓰며 살자는 게 벌써 40년이 넘었다.”

그는 요즘 낙관으로 ‘노취(老醉)’를 함께 쓰고 있다. 늙은 취묵헌이란 뜻이다. 늙어가며 생길지 모를 탐욕을 경계하자는 뜻으로 지었다.

그의 서체는 자유롭다.

“모름지기 글씨란 내 모습 생긴대로 쓰면 그만이다. 세간의 호불호를 떠나 내가 좋아하며 즐기면 족하다.”

개인전 때 찾으신 분들의 방명록 서명을 보고, 지난해 독특한 작품을 구상했다. 서명자 중 지금은 돌아가신 42명의 필적을 작품에 담았다. 그리고 가운데에 ‘세월장면면(歲月藏面面)’이라 썼다. 그분들 얼굴(면면)을 생각하며 글씨를 ‘그렸다’. 서예의 길을 열어주신 천안농고 교장선생님을 비롯해 대학은사 조병화 시인, 전 천안시장 김현구, 김충현·창현·응현 등.

그의 서예 입문은 우연하게 이뤄졌다. 세 살 때 여섯 살 위 형의 서예 개인교습을 보면서 먼발치서 익혔다. 고교 때 교장실 미화용으로 쓴 글씨가 서예가인 교육청 학무과장 눈에 띄어 배움을 받게 됐다. ‘서예하는 여대생’ 신문기사에 혹해 편지를 띄웠다가 인연이 돼 우관 박이양의 지도를 한 달 간 받기도 했다. 그는 한 선생님으로부터 오랜 기간 지도를 받은 적이 없다. 임서(臨書)에 소질이 있어 한 번 본 글씨를 기억해, 따라 쓰면서 익혔다.

“천하제일 행서로 불리는 왕희지의 ‘난정서’로 국전에 도전했다. 여섯 번 낙선한 끝에 76년 입선했다. 특선 욕심이 있었으나 국전이 미술대전으로 바뀌면서 포기했다” 그러면서 심사위원들 취향에 맞춘 서체 쓰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서체를 찾아 나섰다.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글 짓고 그림 그리는 걸 즐긴다. 90년대부터 문인화를 그렸다. “내가 좋아 붓을 들었고, 흥이 일 때마다 글을 지었다. 보잘 것 없지만 그것도 내 흔적이니 즐길 따름”이라고 말했다.

취묵헌은 3년 전 당뇨 때문에 즐기던 술을 끊었다. 지난달엔 담배도 끊었다. 그 때문에 “살 맛이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건강해야 붓을 잡을 수 있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대신 그는 태조산 인근 카페를 들러 커피를 즐기곤 한다.  서실 중앙에 추사 김정희가 71세로 죽기 사흘 전에 썼다는 봉은사 ‘판전’ 현판 글씨가 있다. 그 옆에 올해 초 취묵헌이 쓴 ‘천마행공(天馬行空)’이 있다. 두 작품에서 비슷한 웅혼함이 느껴졌다. 그는 2016년 일중서예상 부상 격인 개인전을 열게 됐다.

지난달 말 ‘일중서예상’을 수상한 취묵헌 인영선씨가 작품 ‘歲月藏面面’에 담은 필적의 주인공들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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