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解氷)
해빙(解氷)
  • 심억수 <시인>
  • 승인 2014.03.04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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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심억수 <시인>

아내와 산막이옛길을 걸었다. 어느새 나무들은 기지개를 켜고 숨을 크게 쉬고 있다. 발밑에는 언뜻언뜻 연한 새싹들이 보인다. 언 땅을 비집고 고개를 내민 복수초도 노랗다.

저만큼 두 나무가 몸을 기대고 하나가 되어서 서로 바라보고 있다. 연리목(連理木)이다. 저들은 어떤 인연이기에 저토록 서로 다른 몸이 하나가 되었을까? 하나의 몸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아파했을까. 아내의 손을 꼭 잡아본다.

연리지 나무를 보면서 인연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사전적 의미의 인연이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라고 한다. 불교에서 인연이란 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때로는 그 사람 때문에 울기도 했고 기뻐도 했으며 아쉬워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 득이 되는 사람은 좋은 인연이요, 해가 되는 사람은 악연이라는 생각만 했다. 인연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운이 없어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는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나로 인한 원인으로 연이 끈기고 이어진다는 법칙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과 스치고 지나간 인연에 지금까지 내가 옆에 두고 아끼고 싶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 내 생에 가장 좋은 인연은 아내와의 만남이다. 옷깃이 한 번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전생에 얼마나 많은 인연을 스쳤기에 부부의 연으로 만났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푸른 하늘같이 꿈도 소망도 컸던 시절 한 송이 꽃으로 수줍게 내 곁에 다가온 인연이 지금의 아내다. 세파(世波)를 이겨낸 아내는 절인 배추 모습이 되어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생각할수록 고맙고 고마운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무심한 남편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내라는 굴레를 씌어놓고 남편 잘 보필하고 살림 잘하며 아이 잘 키우는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아내가 내 곁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서로 마주 보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흔들리는 것을 은연중에 꺼렸다. 그런 내가 연리목을 보면서 우리 부부의 모습을 봤다면 욕심일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모진 비바람에 흔들리고 서로의 부딪침이 있어야 연리목이 된다. 조금씩 부딪쳐 서로에게 상처가 나야만 서로 맞잡고 자신의 체액을 나눌 수 있는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그러하지 못했다. 나는 상처를 외면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아내 혼자 많은 시간, 쓰리고 아픈 상처를 붙들고 있었다.

연리목을 보면서 그들이 견뎌야 했을 시간이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아내에 대한 측은지심의 발로(發露)에 이제야 인과법칙(因果法則)을 알 것 같다.

두 몸을 꼭 붙이고 서 있는 연리목이 꽃샘바람에 서걱서걱 울음소리를 낸다. 나도 가슴 밑바닥에서 뭉클 뜨거운 무엇인가 올라온다.

인연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고 가꾸는 결과다. 좋은 인연도 내가 만드는 것이요, 나쁜 인연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아내에게 난 상처를 나의 몸과 마음으로 보듬다 보면 서로의 체액이 하나로 흐르는 연리목처럼 해빙(解氷)될 것이다. 아내를 잡은 손에 땀이 촉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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