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냉장고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4.02.0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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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냉동실의 문을 연다. 깨끗하게 정리된 내용물들이 마음까지 환하게 해준다. 실은 며칠 전에 오래된 냉장고를 수리했다. 밖은 꽃샘추위로 매우 춥지만 내가 지내는 집은 삶의 온기로 봄같은 겨울이다.

냉장고를 언제 구입하였는지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주방의 한 부분이 된 것이 10년이 훨씬 넘었다. 변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분주한 직장생활 핑계로 냉장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어느 때 보면 언제 사다 넣었는지 모르는 부패한 것들도 가끔 있었다. 미처 봉지도 뜯지 못한 채 버리기도 하였다.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벽에 있는 플러그가 빠져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어머니께 여쭈어 보니 소리가 나서 코드를 뺐다고 하셨다. 컴퓨터도 소리 난다고 플러그를 다 뽑아 우리가 당황한 적도 있다. 문제는 냉동실에 얼었던 것들이 녹아 있었다. 그곳을 정리해야 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플러그를 꽂으니 녹은 물과 냉동실에 있던 것들이 얼어 한데 엉겨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시간을 놓치고 여러 날이 지나 마음의 짐만 쌓였다. 냉동실을 열 때마다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걱정만 했다.

냉장고는 그뿐만 아니었다. 심한 소음과 더불어 냉장실 아래 칸에 가끔 물이 고이는 것이다. 물을 수건으로 다 짜내었는데 얼마동안 괜찮다가 다시 며칠 전부터 물이 차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냉장고 수명이 다 된 것 같아 교체하기로 했다.

지인이 명절 후에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가 냉장고 소리를 들은 것이다. ‘왜 시끄러운 저 소리를 고치지 않고 있느냐’고 했다. 우린 냉장고가 오래되어 바꿀 계획을 이야기 했다. 지인의 말로는 서비스센터에 연락하면 금세 고쳐 준다고 하였다. 자기들은 더 오래된 것인데도 고쳐서 잘 사용한다고 했다.

이튿날 남편은 컴퓨터에서 구입했던 제품의 회사 홈페이지를 찾아 고장 신고를 하였다. 신고를 마치자 방문시간, 수선하러 올 사람의 이름, 얼굴까지 게재되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그런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니. 조금은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신고후 한 시간 남�!臼� 기술자가 방문하였다. 그분은 냉장고를 살펴보더니 수리비가 5만원가량 들겠다고 이야기 했다. 내용물을 다 비워야 한다고 하였다. 냉동실 윗칸에 있는 것들을 커다란 양푼을 가져다 놓고 그곳에 모두 옮겼다. 문제는 아래 얼음과 범벅이 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수리하러 오신 분에게 창피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바가지에 물을 채우게 한 후 전기 송곳으로 얼어붙은 것을 물을 데워가면서 녹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좀 넘게 작업을 하더니 냉동실 아래층에 붙어 있는 것들을 모두 떼어내었다. 비닐에 싸인 고기, 떡, 미숫가루 등이 어지럽게 들어있었다.

이번엔 물이 고이는 냉장실 부분을 수선했다. 두 시간 반 동안 냉동실과 냉장실의 부속을 교체하여 새냉장고로 재탄생 시켰다. 친절히 수리한 덕분에 더이상 냉장고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리하지 못한 것들이 어찌 냉장고에만 있겠는가. 생활 속에서 제때에 해야 할 일을 미루어 두었던 것들이 보이지 않게 쌓인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기술자가 냉장고를 말끔히 수선하듯 내게 아직 남은 일들을 이루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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