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능욕하는 정치인들.
책을 능욕하는 정치인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4.01.26 2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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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보은·옥천·영동>

그야말로 우후죽순(雨後竹筍)이다. 전국에서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 봇물이 터졌다. 이들 출판기념회가 ‘뇌물모금회’라는 비아냥을 듣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제는 ‘못하면 등신’이 될 정도의 폐습으로 고착돼 버렸다. 여기서 받는 책값은 내역 공개, 영수증 발행, 선관위 신고 및 회계 검사 등 법적 의무가 따라붙는 정치자금과 달리 내역 공개도 필요없고 지출 용도 제한도 없다. 정치자금은 연간 1억5000만원으로 모금액이 제한되지만 출판회서 거둬들이는 책값은 상한선도 없다. 얼마를 받아 어디에 썼는지 알길이 없다. 정치인들이 앞다퉈 출판기념회를 여는 이유가 자명해진다.

이들의 출판기념회는 우선 ‘책’과는 상관이 없는, 더 분명히는 ‘책을 모독하는’ 행사이다. 행사장에서 내놓는 책들 대부분이 책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수준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치적 홍보에 자화자찬으로 일관하는 자전적 내용 일색이다. 한 정치평론가는 “보내줘서 받기는 하지만 창피해서 사무실 책장에 꽂아두지도 않는다”고 털어놨다. 분량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발의한 법안을 배경까지 장황하게 베끼기도 하고, 그 것으로도 부족하면 가족 소개까지 동원한다. 제손으로 쓴 책도 많지 않은 모양이다. 남의 책을 대신 써주는 ‘고스트 라이터’들이 요즘 엄청난 특수를 누린다고 한다. 잘나가는 대필작가는 정치인 서너명으로부터 한꺼번에 작업을 의뢰받아 주머니를 채우고 있단다. 진짜 작가들은 배를 곯는 출판 불경기에 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읽는 사람이 없는 이런 책들이 엄청난 폭리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출판기념회에서는 참석자들이 줄을 서서 책값을 현금이 아니라 봉투로 낸다. 봉투안에는 얼마나 들어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사자와의 이해관계에 따라 최소 10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까지 들어있다고 한다. 평균 20만원 정도로 보는 것이 상식이다. 책 한권에 드는 원가가 5000~ 6000원 정도라고 하니 20배 가까이 남는 장사를 하는 셈이다. 기본이 1억원이고 실세 정치인들은 10억원 이상을 거뜬히 챙긴다는 것이 정설이다. 워낙 많이 남는 장사이다 보니 책 한권으로 두번의 기념회를 갖는 철판 정치인도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든다. 과연 이들이 욕을 먹으면서까지 출판기념회를 가져야 할 만큼 정치자금이 절실한 걸까. 국회의원은 연간 1억5000만원, 선거가 있는 해는 3억원까지 후원회를 통해 자금을 모아 사용할 수 있다. 임기중 합법적으로 7억5000만원 모금이 가능하다. 상식적으로 따져보면 이 돈이 부족하다고 할 수 없다. 이들은 국고 지원을 받아 비서·보좌진을 7명까지 고용해 부릴 수 있다. 지구당 조직이 없어진지 오래인 요즘 조직 관리에도 큰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연락사무소 한 곳에 관리직원 1명이면 족하다. 요즘은 시골 노인들도 국회의원에게 밥이나 막걸리를 조르지 않는다. 50배를 물어야하는 룰에 걸려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의원들이 출판기념회를 빙자해 ‘을’들의 주머니를 터는 몰염치한 행태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면 이 돈이 실제 정치활동에 사용되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재산이 무럭무럭 늘어가는 일부 의원들을 볼 때마다 이런 의혹은 더 깊어진다

국민이 맡긴 권력을 밑천으로 벌이는 부당한 책 장사는 이제 없어져야 한다. 얼마전 영남의 한 정치인이 ‘책 없는 출판기념회’를 열어서 화제가 됐다. 행사장에서는 참석자들에게 책을 소개만 하고 구매하려면 서점을 이용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식의 출판기념회가 아니라면 공개와 과세의 원칙을 적용해서 무엇보다 책이 뇌물의 매개체로 악용되는 부끄러운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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