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로 난 작은 길
사람 사이로 난 작은 길
  • 오창근 <칼럼니스트·충북참여연대 사회문화팀장>
  • 승인 2014.01.22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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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충북참여연대 사회문화팀장>

청원군의 연꽃마을 근처, 그림 같은 펜션이 사람들로 붐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친구와 그 가족이 모여 1박 2일 함께 지내기로 했다. 어느덧 머리에는 흰 새치가 나부끼고, 곁에는 아빠 키를 훌쩍 넘은 녀석들이 싱거운 인사를 한다. 음식도 나누고 근황도 물으며 자주 못 본 인사를 몰아서 한다. 약속시각 보다 먼저 도착한 친구가 다수인 것을 보니 이곳까지 오는 내내 설렜을 마음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돌이켜보니 20여 년이 훌쩍 지났다. 제대 후 복학해서 헐렁한 군 야상을 입고 캠퍼스를 오르내릴 때 복학한 다른 과 친구를 만나면 얼굴은 낯익은데 아는 체하기가 겸연쩍어 어물거린 적이 많았다. 모두 사범대 학생들이라 함께 수업을 여러 번 들었다.

몇몇 친구와는 눈인사를 건네고 지냈지만 살갑게 인사할 친구는 많지 않았다. 고심 끝에 눈여겨본 체육학과 친구의 자취방을 찾았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과별도 한명씩 만나 의미 있는 모임을 만들어 보면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흔쾌히 동의한 체육과 친구를 앞세워 역사교육과, 지리교육과, 수학교육과 등 다른 과 친구를 한 명 씩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의기투합한 일곱 명의 친구가 옹색한 자취방에서 첫 회동을 했다.

모임 이름을 죽림회(竹林會)라 짓고, 얼마 후 단합대회로 속리산 등반을 했다. 비선대 부근에서 전신에 쥐가 나 오가지도 못하는 한 청년을 만나 119에 신고를 하고, 문장대까지 둘러업고 내려온 경험은 지금도 만나면 흐뭇한 추억으로 곱씹는다. 사범대 학생들인 만큼 좋은 교사가 되자는 약속을 했다. 약속대로 날 제외한 나머지 친구는 모두 교사가 되었고, 대부분은 현재 부부교사다. 7명이 이제는 26명의 대가족이 되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람을 안다. 건네받은 명함의 두께만큼 신뢰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그때는 열정이 있었고, 지금보다는 순수했다. 촌지 받지 않는 교사, 승진보다는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즐거움을 느끼는 교사가 되자는 약속을 아직도 그 친구들은 지키고 있다. 돌이켜보면 대학교 4학년 때 치기 어린 다짐이었는지, 모르지만 서로의 마음을 비춰보고 내 삶을 돌아보는 좋은 거울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아마도 현재보다는 미래에 더 가치를 둔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어느덧 20여 년이 넘었다. 사람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살려고 노력은 했지만,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날 선 말로 상대를 공격하고, 배려하기보다는 약점을 잡으려 부산했는지도 모른다. 때론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기보다는 머릿속에서 재단한 말을 꺼내는 약사 빠름도 보였다. 진심을 담은 말보다 상대의 기분을 맞추는 영악스러운 말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것이 나이를 먹는 것이고, 세상을 사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여겼다.

내 몸의 반과 내 삶의 반을 남에게 빌려 채운 것을 알지만, 그 고마움을 잘 몰랐다. 사람의 가치보다는 물질의 가치를 중히 여기고, 내 뜻과 맞지 않는 사람은 도외시하고, 폄훼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살았다. 시선은 낮추고, 허리를 굽히고, 마음을 숙여야만 그 안에 사람이 든다는 사실을 모르고 산 세월이 길다.

풋풋했던 그 시절, 그렇게 만난 친구들의 모습에서 조금은 더 유연해지고, 지금보다는 더 보듬고 사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무언의 가르침을 받았다. “�!�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좋은 벗이 될 수 없다”는 청초(淸初)의 사상가 이탁오 말이 한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연유를 오늘에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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