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리에 밀린 원칙과 신뢰
당리에 밀린 원칙과 신뢰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4.01.19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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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보은·옥천·영동>

정당정치와 지방자치를 운영하는 나라에서 공직선거 출마자의 정당공천을 배제하자는 주장이 나온 것은 그 자체로 부끄러운 일이다. 더욱이 이런 정치적 퇴보가 여야 대선 후보들의 공동 공약으로 제시되고, 제도의 실행 주체인 여야 정당이 추진 절차를 주도하는 현실은 요즘 박근혜 정부가 타도 대상으로 강조하는 ‘비정상’의 극치이다. 이런 비정상이 추진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더 큰 비정상을 피해가기 위해서다.

지방정치인들은 공천권을 틀어쥔 국회의원의 수족으로 전락했다. 대변해야 할 상전은 유권자가 아니라 국회의원이다. 한 국회의원 상가에 기초의원들이 달려가 문상객들의 신발을 정리하는 모습이 눈총을 받기도 했다. 충북 남부 3군에서는 국회의원이 정당을 바꾸는대로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이 어미닭 따르는 병아리처럼 우르르 따라나서는 행태가 두 번이나 연출됐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을 국회에 예속시켜 운영하는 것이 ‘백해무익’하다는 점이다. 배울 것도 없는 큰 집이지만, 대체로 배워서는 안 될 것만 배워 흉내를 낸다. 의장단 선거 등 현안 앞에서 소속정당으로 갈려 패당적 행태를 보이는 것은 국회에서 배운 그대로다. 1년에 시·군정질문 한 건 못하면서 연수를 빙자한 해외나들이에는 기를 쓰는 지방의원들이 허다하다. 지방정치가 고비용 저생산 지적을 받으며 존폐론에 봉착하곤 하는 것은 국회의 이런저런 폐습에서 오염된 탓이 크다.

바로 엊그제만 해도 국회의원 3명이 대법원의 유죄 확정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3명 모두 비자금 조성, 공천 로비, 불법 기부 등 금품 비리와 관련됐다. 현재 대법원 재판이 진행 중인 국회의원도 5명에 달한다. 지방정치와 직접적 연결고리를 끊어야 할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도 기초 선거구 공천을 폐지하기로 한 대선 공약과 정치권 합의가 휴지조각이 될 전망이다. 기초공천폐지에 반대하는 새누리당은 위헌 소지가 높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한마디로 구차한 변명이다. 1995년 30여년만에 지방자치가 부활해 치러진 첫 4대 지방선거에서 기초의원은 정당공천에서 배제됐다. 새누리당 주장대로라며 2기 지방자치는 헌법 유린으로 시작됐던 셈이다. 더욱이 새누리당은 지난해 4·24 재보선에서 나홀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선거구 5곳에 후보를 공천하지 않았던 정당이다. 선거법을 핑계대며 후보를 공천한 민주당은 이들 선거구에서 무소속 후보들에게 전패했다.

새누리당이 기초 선거구 무공천을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삼척동자도 안다. 고공비행하는 자당 지지율에 기대 6월 지방선거를 치르겠다는 속셈이다. 최대 표밭인 수도권의 민주당 출신 현역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들을 무공천 선거로는 이기기 어렵다는 계산도 깔려있다. 새누리당은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린데다 그 무례에 대해 정직한 이유도 대지 않고 있다. 선거법 개정이 헌법에 위배돼 문제가 된다면 굳이 법적 근거 마련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합의로 무공천을 실천하면 된다.  한국갤럽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9%가 기초선거 정당공천을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반대는 25%로 절반에 그쳤다. 새누리당 지지자들도 46%대 34%의 비율로 폐지에 찬성했다. 정치권이 공천폐지 합의를 번복해야 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

기초 선거구까지 싹쓸이 하려는 탐욕적 당리를 위해 원칙과 신뢰를 헌신짝처럼 차버리는 집단이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는 것은 한편의 코미디다. 객석의 호응을 받지못하는 코미디가 얼마나 무대에서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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