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휴대폰으로 시작하는 새해
고장난 휴대폰으로 시작하는 새해
  • 정규호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 승인 2014.01.02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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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한 해를 마무리하던 12월 마지막 날. 사소한 부주의로 책상위에 올려 놓았던 휴대폰이 방바닥으로 툭- 떨어지면서 전원조차 들어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문자로 카톡으로 쉼없이 들어오고, 또 거기에 응답하거나 미처 인사를 드려지 못한 분들께 체면치례를 하던 도중이어서 잠시 황당하긴 했으나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아직 아날로그 세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휴대폰 문자로 날아드는 새해 인사를 그리 마뜩치 않게 여겨왔던 터라 처음에는 쉴새없이 울려대던 문자메시지 도착 신호음이 잠잠해짐을 짐짓 기꺼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처럼,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로운 세밑을 보내며 TV를 통해 제야의 종소리를 느긋하고 평화롭게 들을 수 있는 호사도 누리게 됐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장 새해 첫 날 새벽부터 닥쳐 온 크고 작은 불편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키워 온 휴대폰의 위력을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선 새해 첫 해돋이를 맞이하기 위해 휴대폰에 맞춰 놓은 새벽 기상 시간 알람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게 됐다는 점입니다. 구름에 가리지 않고 제대로 떠오른 2014년 첫 해를 맞이하는 일은, 그나마 늦지 않게 잠에서 깨어나는 습관 탓에 제때 맞출 수 있었으나 사진촬영 조차 휴대폰에 의지해 온 탓에 그 멋진 장면을 오래 간직할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휴대폰의 전원이 사라져 버린 순간부터 내가 본 멋진 새해 첫 해돋이 장면을 찍어 고마운 분들께 전달하며 함께 새로움을 만끽하려던 내 소박한 마음도 옮기지 못하게 되고 말아 서운하기 그지 없습니다.

휴대폰의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 계속되면서 당초 내가 누렸던 모처럼의 평화는 이후 서서히 불안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1월1일은 당연히 휴대폰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전자제품의 수리 서비스조차 중단되는 휴일인지라, 마치 외부 세계와 확실하게 단절된 채 고립돼 버린 느낌마저 지울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 기막힌 일은 아내가 잠시 외출한 사이, 급하게 연락할 일이 생겼는데도 도대체 아내의 휴대폰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 휴대폰에 저장된 단축번호를 누르는 것 만으로 연결되고 소통되던 내 영혼은 휴대폰 전원이 나가는 순간 끊어지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가고 있음을 그동안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셈입니다.

영화 입장권 예매도 휴대폰에만 의지해 왔던 탓에 영화관 박스오피스에 직접 나가 한참을 기다린 끝에 얻은 좌석은 그나마 맨 앞 줄. 참으로 불편함이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불편함으로 시작된 새해가 그리 무의미한 것도 아니더란 말입니다.

우선 하루 종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강박감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책을 잡을 수 있었고, 미리 나가 기다리면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살펴보는 일도 최근 몇년 사이 겪어보지 못한 재미있는 일로 되살아 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휴대폰이라는 작은 기계에 의존해 세상일에서 소외되거나 격리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내심 바라는 안간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은 어쩌면 현실의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하는 기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거기에는 지극한 기계에의 의존만 있지 ‘사람’의 존재가치가 희미해지는 폐단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두뇌와 감성의 영역은 갈수록 줄어들고 도구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세태는 아무래도 갈수록 차가워질 뿐 쉽게 따듯해 질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긴 시간 아날로그식으로 기다렸다 본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는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렌즈에 담지 않고 그냥 지나가게 놔둔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사람과 세상의 참모습에 대한 화두일텐데. 기계에 무조건 기대는 ‘기록’과 사람의 뇌리와 가슴에 감성으로 담는 ‘기억’은 그 차이와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일깨우게 합니다.

꺼져있던 휴대폰의 전원을 아주 하찮게 되살리며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2014년의 시작입니다.

올 한 해 모두 안녕들 하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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