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한 시
밤 열한 시
  • 이헌경 <음성대소초 사서교사>
  • 승인 2014.01.02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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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읽기
이헌경 <음성대소초 사서교사>

아가를 재우고 오롯이 나에게 빠져드는 시간, 거실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차 한잔에 하루를 돌이켜보는 시간, 정리하지 못한 물건이 있다면 제자리에 돌려두는 시간, 멋진 작가를 만나고 좋은 글귀에 빠져드는 시간 그리고 짧은 어휘력으로 나의 생각을 활자로 표현하는 지금 이 시간. 바로 밤 열한 시(황경신 글/김원 그림·소담출판사).

오랜만에 황경신의 글을 다시 만났다. 읽을 때마다 감성 폭발을 일으키게 하는 그 주인공의 책을 한달이 넘도록 손에서 떼지 못하고 읽고 또 읽고, 되새기며 생각하며 추억에 빠지며 뒤적이고 있다. 제목 탓일까 싶어 괜히 이른 아침에도 읽어보지만 느지막하게 떠오르는 겨울 아침 햇살이 눈부실 뿐 여전히 어젯밤처럼 마음이 자글자글 거린다. 꿈틀꿈틀 거린다.

벌써 그녀의 열일곱번째 책이다. 이렇게 많은 책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글을 좋아하는 나처럼 마음 자글자글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정말 어리석도록 깊고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말임을 일깨워 준 ‘생각이 나서’ 그 후 3년 동안의 이야기가 붉은빛을 머금고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작에서는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기억의 조각들과 일상의 단상을 모았다면 이번에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속에서 호흡하고 있는 너와 나의 사이, 기쁨과 슬픔 등 삶이 주는 모든 감정들을 고스란히 녹여 놓았다. 조용하지만 강하게 다가온 그녀의 또 한편의 에세이. 가을바람으로 시작한 그녀의 촉촉하게 휘감는 언어는 겨울 햇살과 봄비를 지나 여름밤의 소리 없는 번개로 마무리된다.

문화잡지 페이퍼의 편집을 맡고 있어서일까. 책의 디자인과 구성 역시 깔끔하게 마음에 쏙 든다. 마치 그녀의 일기장을, 일상을 훔쳐보는 듯 쫄깃함까지도 말이다. 더욱이 오랜 시간 페이퍼에서 호흡을 맞춰온 김원의 그림이 더해져 훑어보기만으로도 감성 촉촉해지니 말이다. 제목이 주는 시간의 마력, 황경신의 매력적인 언어, 김원의 감각적인 그림이 잘 어우러진 또 하나의 작품.

그녀가 말한 밤 열한 시는 어떤 시간일까?

오늘 해야 할 일을 할 만큼 했으니 마음을 좀 놓아볼까 하는 시간.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못 했으니 밤을 새워볼까도 하는 시간. 내 삶의 얼룩들을 지우개로 지우면 그대로 밤이 될 것도 같은 시간. 술을 마시면 취할 것도 같은 시간. 너를 부르면 올 것도 같은 시간. 그러나 그런대로 참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시간 그런 시간이다. 그리고 하루가 다 지나고 또 다른 하루는 멀리 있는 시간. 그리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고 사랑도 멈추고 모든 걸 멈출 수 있는 시간. 참 좋은 시간이다. 그녀에게 밤 열한 시는 참 좋은 시간이다. 나 역시 일년이 넘도록 밤늦은 외출을 하지 않다 보니 이 시간은 세상 모두 잠들고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배경음악이 되는 엄마도 아내도 아닌 한 여자인 나만의 시간, 참 좋은 시간이다.

무얼까 했는데 이제야 그 노래 제목이 떠오른다. 비 오는 날이면 라디오에서 종종 흘러나오는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 임현정의 노래. 이 책을 읽다 보면 괜스레 이 노래가 머릿속에 맴도는 이유가 뭘까.

‘누군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느려지고 있노라고 아주 조금씩 천천히 느려지는 중이라고 느림과 친해지고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그녀의 바람처럼 나 역시 그러고 싶다. 한 손에 그녀의 책을 들고 시간의 느림을 삶의 느림을 마음의 느림을 오늘 하루의 끝자락을 잡고 욕심 없이 천천히 다가올 내일을, 내일의 희망을 꿈꿔본다. 밤 열한 시의 마법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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