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김예식의 '이야기 天國'
향토사학자 김예식의 '이야기 天國'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9.15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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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는 조선의 역관 홍순언이다
소화야 행복하게 살아라(1)

선조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역관 홍순언은 정사(正使)를 따라 북경으로 향했다. 도중에 통주(通州)라는 곳에 잠시 머물렀다. 객지에 나온 김에 술 생각이 간절했던 그는 기방을 찾아갔다.

"역관 나리께서 소화(素花)라는 이 아이 머리좀 얹어 주십시오."

원래 역관이나 사신들의 씀씀이가 크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이었다. 술과 여자라면 마다하지 않는 그였지만, 그래도 기생의 머리를 얹어 주는 행운은 아직 얻지 못했을 때였다.

홍순언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술상과 함께 소화라는 아리따운 기생이 들어왔다. 그는 석 잔의 술을 거푸 마시고 나서 바들바들 떠는 소화의 손을 끌어당겼다. 소화는 과연 숫처녀인지 눈을 딱 감고 홍순언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기만 했다. 젖가슴을 만져보니 주인의 말대로 손 한번 타지 않은 듯 탱탱했다. 젖가슴을 몇 번 주무르다가 홍취가 오른 그가 저고리를 살짝 들추는데, 속옷이 어쩐지 소복처럼 하얗게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하얀 속옷이려니 했는데 옷고름을 풀고 가슴을 헤치다 보니 그것은 틀림없는 소복이었다.

"요즘 기생들은 소복을 입는게 유행인가"

"아니옵니다. 제 아버님은 이곳에서 말단 관리로 일하셨는데 얼마전에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강남 땅에 살던 우리 모녀가 아버님을 고향으로 모시러 올라왔지요. 그런데 그만 슬픔에 겨운 어머니마저 이승의 연을 놓아버리셨답니다. 하여 아직 소복을 벗지 못했나이다."

"저런, 그러면 부모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단 말이렸다"

"고향으로 모시자니 수중에 가진게 없어 오늘부터라도 몸을 팔고자 기방에 들었습니다."

홍순언은 그만 술이 퍼뜩 깨는 듯하여 안고 있던 소화를 번쩍 들어서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홍순언에게 풀려난 소화는 옷고름을 매듭짓고 그걸 잡아당겨 눈물을 닦았다. 그런 얼굴이 아리땁기도 했지만 홍순언은 처연해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대체 망인들을 모시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

"말과 수레를 사야하니 못해도 500냥 정도는 필요하옵니다."

정이 많은 홍순언은 금세 마음이 울적해졌다.

"에이, 내품에 안긴 토끼 한 마리를 어찌 늑대 소굴에 버려두랴."

그러고는 공금으로 쓰라고 조정에서 타 온 돈을 꺼내 비용을 맞추었다.

"소화야, 이 돈으로 어서 고향에 돌아가라. 딸 같은 널 차마 데리고 잘 수가 없다."

돈주머니를 열어 본 소화는 그 액수에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큰돈을 내주시면 어쩌시려고요 보아하니 나리의 돈도 아닌 것 같은데"

"걱정마. 나야 감옥에서 며칠 고생하면 그만이지만 소화 너한테는 평생이 달린 일이잖아. 너하고 내 나이를 짐작해 보니 우린 부녀지간쯤 되겠구나.

"나리, 하오면 장례를 치른 다음에 절 데려가 첩이라도 삼으십시요."

"쓸데 없는 소리! 내일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넌 이제 기생이 아니라 내 딸이다."

"하오면 아버님, 아버님 성함이라도 그래야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이름을 알아 무엇 하리. 더구나 네 고향이 강남이라니 이승에 다시 볼 일이 있겠느냐."

"그러니 이름 석 자만이라도 알려 주시어요, 아버님."

"난 조선 역관 홍순언이야. 제발 소화 네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거기서부터 공금이 한 푼도 없는 사신들은 때가 되어도 밥을 먹지 못하고 밤이 되면 여관에도 들지 못하고 아무데서나 한뎃잠을 잤다. 정사가 급한 대로 주머닛돈을 털고, 역관들이 숨겨 간 돈까지 다 털어서야 가까스로 일을 보고 귀국할 수 있었다. 한양에 돌아가자마자 홍순언은 덜컥 감옥에 갇혀 버렸다. 기한도 없는 중형이었다. 그런중에 명나라에서 '대명회전'을 재 편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선조 임금은 200년간 응어리졌던 한을 풀기 위한 중계변무주청사로 황정욱(黃廷彧)을 뽑고, 이어서 역관들을 선발했다.

<다음주 금요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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