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귀
사마귀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3.11.24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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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하루에도 몇 번을 만나는 아이가 있다. 정서적으로 병을 앓고 있는 이 아이의 가슴에는 엄마모습이 사라진지 오래다. 수년을 전화 한통 하지 않고 수신거부까지 해놓았다고 하면서 그저 어디쯤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뿐,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을 강하게 부정한다. 이 아이가 많이 재잘거리는 날은 내 마음이 더 아프다.

퇴근 후 빨래를 걷어 개는데 사마귀 한 마리가 붙어있어 기절초풍을 했다. 빨래대에 널은 옷에 달라붙어 있다가 딸려 왔나보다. 세모난 얼굴에 뛰어나온 눈은 희미하고 여름철 풀밭에서와는 달리 거무스레한 날개와 다리에 힘이 없어 보인다. 꽤 추운날도 많았는데 지금껏 어찌 살다가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풀꽃들이 피어날 때 사마귀는 나비와 벌과 꽃등에와 같이 나의 단골모델이었다. 겉보기에도 늘씬하고 몸의 움직임이 적어 사진모델노릇을 톡톡히 해주었다.

사마귀는 어리석고 잔인한 곤충으로 알고 있다. 어리석음의 표본으로 사마귀 하면 당랑거철(螳螂拒轍)을 생각하기 마련이다.《장자》의 인간세편(人間世篇)에 중국 제나라의 장공(莊公)이라는 이가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가는데 사마귀가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를 멈추려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고 있다. 제 역량을 생각하지 않고 강한 상대나 되지 않을 일에 덤벼드는 무모한 행동거지를 비유 하는 말로 수레바퀴에 깔려서 명을 다할 줄도 모르고 앞발을 들고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그처럼 표현했는데 장공이라는 분도 어지간히 시력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곤충들이 대부분 시력이 나쁘고 난시인 점을 감안한다면 사마귀는 다가오는 물체가 수레바퀴로 보인 것이 아니고 커다란 물체로 보였을 것이다. 많이 날지는 못하지만 날아올라 먹이를 기다릴 수 있는 물체가 다가오니 자세를 취한 것을 그렇게 보지 않았을까. 사냥을 가신다는 분이 사마귀나 관찰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사냥을 가는 것이 아니라 사냥 구경을 하러 가던 길이 아니었나 싶다.

올해 풀꽃을 가꾸면서 사마귀에 대한 생각을 달리했다. 우연히 이슬비 오는 아침벌개미취를 찍기 위하여 조리개를 맞추다 비를 맞고 있는 어린 사마귀의 모습을 보게 된 날이다. 벌개미취에 모여드는 벌과 나비를 기다리다 비를 맞았는가. 비 내리는 아침에 벌과 나비가 찾아들지는 않을 터. 밤새 비를 맞고도 고개 한번 돌리지 않는 기다림을 무모하다 할 수 있을까. 기다림도 이 정도면 도의 경지가 아닐 수 없겠다. 미련한 것 같으면서도 가시권내에 먹이 감이 포착되면 그 동작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날렵 하기도하다. 다른 곤충들이 꽃이나 줄기의 일부로 착각하여 접근하면 짧게 구부리고 있던 앞발을 순간적으로 사용하여 낚아챈다. 그 빠르기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다. 기다림과 빠른 동작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먹이를 얻는 사마귀를 보면 어리석다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사마귀는 종족번식의 모습에서도 잔인함의 대명사로 비춰 지기도 한다. 짝짓기를 한 뒤 암컷은 수컷을 잡아먹는다지만 모든 암컷이 수컷을 다 잡아먹지는 않는단다. 암컷이 알을 낳기 위해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서라나. 죽어도 좋은 만큼 후세를 사랑하는 수컷의 희생으로 내년에 다시 어린 사마귀가 알에서 나오니 이것도 자세히 보면 잔인함이 아닌 아름다운 희생인 것 같다. 암컷 사마귀는 산란기가 가까워지면 몸이 매우 둔해지고 뱃속의 알을 발육하기에 턱없이 모자라는 단백질을 섭취할 방법이 없어 알을 안전한 곳에 낳은 후 암컷도 죽고 만다니.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수컷 사마귀, 자신의 영양분을 모조리 쏟아 부어 자식을 낳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고 생을 마감하는 암컷사마귀, 자기희생을 통해 종족을 유지하는 모습이 처연하지만 아름답게 보인다.

이 겨울, 옷 속에 날아든 갈색으로 변장한 사마귀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바라보고 있으려니 아이의 엄마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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