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서랍
여자의 서랍
  • 정선옥 <충북중앙도서관 사서>
  • 승인 2013.11.14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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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읽기
정선옥 <충북중앙도서관 사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끔은 동료와의 헤어짐이 아쉬워 떠남을 망설인 적이 있다. 그중에는 아이 키우는 일이나 글을 쓰는 일로 조언을 구하면 망설임 없이 도와준, 예의 바르고 따뜻하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한 분이 있었다. 교육청 앞마당의 아름드리 마로니에 나무가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고운 빛깔을 가장 먼저 알려준 분이기도 하다. 그녀는 학창시절부터 글을 썼고, 현직에 있으면서 시조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노영임 장학사(보은교육지원청)인데 이번에 ‘여자의 서랍’ 으로 첫 시조집을 냈다.

마치 시처럼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지만, 글자 수를 세어보면 시조의 형식에 맞는다. 그래서 더 절제미를 살려낸 듯하다. 직장인으로, 엄마의 딸로, 선생님으로 살아가면서 느꼈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있어 시인의 일상을 조금씩 엿보게 된다.

‘동백꽃//겨우내 물질하던 어린 누이 손등이랄까?/얼음 박혀 터진 틈새 내비치는 붉은 속살/못 본 척, 눈가 훔칠 때/뜨건 눈물이/후두둑'.

노는 것과 노동으로 인한 터진 손은 사뭇 다르겠지만 이 시조를 읽는데 내 어린 시절과 오버랩 된다. 어릴 적 방 윗목에 떠 놓은 물이 어는 한 겨울에도 밖에서 놀다보니 내 손은 늘 터져 있었다. 엄마의 꾸지람에 하루 이틀은 잠잠하다가 몰래 나가서는 저녁 먹으라는 소리에 이끌려 들어오고는 했었다. 놀다가 터진 손이지만 참 아팠던 기억이 있는데 겨우내 차가운 물질 하느라 터진 어린 누이의 손등은 얼마나 아팠을까? 활짝 피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후두둑 떨어지는 허무한 동백꽃과 누이의 손등이 동일시된다.

‘가을 속내//무른 속내 비칠까/기척도 없더니만/뽀얀 솜털 자위 뜨고/뚝, 떨군 덕석밤/명치끝/치받던 그리움/그렇게 아람 번다'.

명치끝 치받던 그리움을 읽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마음 한곳에 묻어두었던 그리움이 일어난다. 나에게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우리말인 ‘자위 뜨고, 아람 번다’라는 표현이 생소해 사전을 찾아보니 ‘밤톨이 익어서 밤송이 안에서 밑이 돌아 틈이 나다’라는 뜻풀이도 예쁘다. 시인의 글에는 고운 우리말이 자주 보인다.

‘쪼보장한 배롱나무//단단히 말라 쪼보장한 배롱나무 한 그루/당신 좁은 뜨락에 꽃등 환히 밝히시더니/긴긴 날/옹이 하나를 안으로 키우셨나?/바닥난 링거병 따라 흔들거리는 중심/검붉은 오줌 팩을 생의 무게로 매단 채/고장난 메트로놈처럼/박자 잃은 어머니/어미젖 보채 쌓는 하릅송아지 같은 삼남매/비싼 일수 찍듯이 하루 벌어 한 끼니/고봉밥 짓던 아궁이/짚불 환한 기억들/꽁초만큼 남은 목숨 바작바작 타들어 갈 때/숨어서 우는 자유 그마저 빼앗겼다/자꾸만 도돌이표에 맴도는/엄니 엄니이…’.

배롱나무에 달린 분홍빛 꽃이 지고나면 스산하다. 가끔 대화 중에 내비치던 친정엄마의 일상을 듣고는 했는데, 병든 노모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는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시조는 고리타분하고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깬 그녀의 글은 자연 풍경, 아이들, 교사생활, 유년시절, 고전의 재해석, 현시대 풍자 등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다양한 주제를 넘나든다.

‘드넓은 시간과 공간에 펼친 관찰력과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한 이승하 교수의 해설이 와 닿는다. 쌀쌀해진 가을날, 가족 혹은 친구와 따뜻한 차 한 잔 하면서 이 시집을 낭송하며 늦가을의 스산함을 위로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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