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과 친일의 기록
항일과 친일의 기록
  • 강태재 <칼럼니스트>
  • 승인 2013.11.1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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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강태재 <칼럼니스트>

지난 5일, 민영은(閔泳殷) 후손들의 토지반환소송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후손들에게 패소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다들 정의는 살아있다고 반기었는데, 과연 우리들은 정의를 바로 세우는데 얼마나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필자는 이번 송사를 거울삼아 미처 살피지 못했던 잘못된 기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이 계기가 되어 몇가지 문헌자료를 살펴 본 결과, 충북에서 내로라하던 친일파 거두들의 친일행적이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하나같이 잘했다, 베풀었다, 심지어 일제의 차별에 격분하여… 이렇게까지 해 놓았으니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훌륭한 인물이요, 지도자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필자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지금 곧 <인물지(충청북도, 1987), 충청북도지(충청북도지 편찬위원회·충청북도, 1992), 청주시지(충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청주시, 1997)> 등 공공기관에서 간행한 문헌을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친일행적은 변질되거나 지워져 아예 탈색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따로 친일인명사전이나 관련문헌자료를 찾아 대조하지 않으면 누가 친일파였는지 알아 볼 수조차 없게 돼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의 밑바탕 자료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 1913), 가동자서전(可東自敍傳), 청주근세60년사화(청주근세60년사화 편찬위원회, 1985)> 등을 참고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민영은의 경우, 1920년대 자료 중에 그의 화려한 경력과 함께 “觀櫻御宴에 초대되어 천은에 감읍하였으니, 이는 무상의 영광이며, 아울러 언제나 사회와 국가를 위해 공헌함. 드물게 보는 인격의 소유자임. 충청북도 청주의 巨人으로 충청북도 제일의 智者요 仁者이며, 충청북도에서 최고의 부호로 이름난 인물임”이라 평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이 어느 것 하나 실리지 않은 것은 어인 까닭일까요. 혹간 한 두 사람, 한 두 가지가 빠졌다면 실수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하나같이 그러한 것은 집필자가 의도적으로 누락, 왜곡했거나 자료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기존의 문헌을 베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청주 당산에 있는 ‘종2품 가선대부 민영은’ 묘소의 묘비를 보면 친일행적은 한마디도 없이 “충청북도 제일의 智者요 仁者”라는 찬사가 거기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문을 지은 사람은 부자가 친일파로 이름을 올린 민복기(전 대법원장)입니다. 이 찬사가 일제에 의한 것인 줄 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번 잘못된 기록은 여간해서 없어지지 않고 확대 재생산 되어 왜곡되고 있습니다. 기록의 엄중함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이 늦었고 한참 잘못됐지만 그러기에 더욱 힘써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올 8·15 광복절을 기해 ‘충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세우고 나서 박걸순 충북대 교수는 “이제 충북의 ‘항일독립운동가 열전’을 편찬하는 후속작업이 이뤄져야 되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했습니다. 필자 또한 공감하면서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을 주문합니다. ‘항일독립운동가’ 열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친일행적 또한 함께 수록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각급 자치단체와 공공기관단체가 간행하는 각종 문헌과 앞에 열거한 도지, 시·군지 발행 때 친일의 역사,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기록이 왜곡되지 않도록 바로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집필을 맡는 학자들께서 더욱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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