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의 계절
단풍의 계절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3.10.2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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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에서 온 편지
이수안 <수필가>

단풍의 계절이다. 절정의 단풍을 감상하기 위해 길을 나선 사람들로 고속도로가 혼잡하다는 소식이 들린다. 하지만 농사꾼들은 먼 길 떠나지 않고도 매일 단풍을 감상할 수 있다.

이맘 때 들녘을 거닐어 본 사람이라면 알리라, 명산 못지않게 아름다운 단풍이 들녘 곳곳에서 아주 특별한 낭만을 자아내고 있다는 것을. 콩밭에서는 은행잎 색을 닮은 콩잎 단풍이, 벼 이삭 출렁이는 들판에서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잎 단풍이, 그리고 포도밭에서는 나날이 짙어가는 포도잎 단풍이…. 기후조건 등의 영향을 받는 명산의 단풍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것은 당연하다. 기암괴석과 폭포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꽃잎보다 고운 빛으로 고고하게 서 있는 단풍나무, 상상만으로도 숨 막히는 비경이다.

그런데도 나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논밭의 단풍에 더 마음이 간다. 열매를 잘 영글게 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을 다한 후에야 물든 잎새의 노고를 알기 때문이다.

잎새들은 지난 계절의 그 뜨겁던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칠팔월의 땡볕은 아침부터 열기가 대단해 전신을 축 늘어지게 할 정도로 폭력적이다. 그러면 잎새는 금방이라도 잘 못될 것처럼 축 늘어진다. 그래도 땡볕을 거부하지 않은 것은 오직 열매를 잘 익히겠다는 간절함 때문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버거운 일도 해내고야 마는 모성본능이 잎새에도 있는 걸까.

자연의 큰 힘 앞에 인간은 너무도 작은 존재임을 깨달을 때가 많다. 기상 악화로 나무가 고생할 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작은 일뿐이다. 땡볕이 맹렬한 날 밤에는 물을 줘서 야간 기온을 조금이라도 내려주고, 비가 너무 잦을 때는 바닥에 비닐을 깔아 수분흡수를 제한해 준다. 더러는 희붐한 새벽녘에, 더러는 달빛 아래에서도 일하지 않았던가. 나무가 고초를 겪을 때 함께 해준 것에 의미를 둔다. 그렇게 나무와 함께 하노라면 포도나무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랄 때가 있다.

‘너는 심산유곡 빼어난 경치를 배경으로 선 단풍나무도 아니요, 잘 정돈된 공원 벤치 옆의 정원수도 아니다. 많은 포도송이를 잘 익혀야 하는 짐 잔뜩 짊어진 너는 왜 하필이면 나와 함께 하는가. 젊지도 않은데다 지혜롭지도 못하며 힘도 없는 처지에 아직 할 일은 너무 많은 나와 말이다.’

아직 잎새가 다 물들지 못한 것도 있는데 한쪽에서는 벌써 낙엽이 진다.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도 이렇듯 마지막 열정을 담은 단풍을 주워든다.

그때 내 시선을 잡는 것이 있다. 까마중이다. 잎새는 물론 까마중 대도 아직 진녹색이다. 오종종하게 열린 까마중 열매도 아직 푸른 알이 많다. 머지않아 된서리가 올 텐데 아직 검정빛 근처에도 못 간 열매가 처연하다. 나무, 농작물, 꽃…. 모두가 떠날 채비로 분주한데 까마중은 이런 세상물정을 모르는 걸까. 아니, 세상물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삶이 아니던가. 내 삶에서 아직 못한 일이 까마중만큼 많이 남은 것은 아니라는 데에 의미를 두고 용기를 내 본다.

다시 포도나무를 본다. 걸어온 길이 참 고단했다. 고운 빛으로 물든 마지막 열정도 아름답지만 이상기후의 어려움 다 이겨낸 지나온 발걸음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나무처럼 나도 모든 어려움 다 이겨내고 앞으로의 길을 열정적인 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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