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과 소멸, 조각보를 걷어내며
생성과 소멸, 조각보를 걷어내며
  • 정규호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 승인 2013.10.24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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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조각보 선물>

세계 공예인들에게 청주시민의 정성을 선물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여인네들은 쓸모없이 버려지는 자투리 천을 모아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사랑을 전했습니다.

작은 헝겊 조각일지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모아 조각보를 만드는 한국 여인들의 정성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예술입니다.

‘익숙함 그리고 새로움’을 주제로 삼은 2013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조직위원회는 익숙했으나 낡은 옛 연초제조창을 새롭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조각보 선물 프로젝트>를 만들었습니다.

도심에 난무하던 현수막은 그동안 그냥 버려지거나 불에 태워졌습니다.

대한민국 녹색수도 청주는 그런 현수막에 새 생명을 불어 넣기로 했고, 청주시민의 숨결은 낡은 공장 건물을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단장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무려 15톤의 버려지는 현수막을 알뜰히 모았고, 이 가운데 고운 색깔만 골라 68만 조각으로 나누어 자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른 조각을 다시 이어 붙이는 한 땀 한 땀의 바느질에 참가한 시민의 숫자만 3만여명.

그런 지극 정성으로 만들어진 1004개 조각들이 마침내 낡은 공장 벽을 아름답고 포근하게, 때로는 바람에 나부끼는 힘찬 깃발처럼 드리워져 2013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세상에 건네주는 큰 선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청주시민들은 말합니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고 참 아름다운 2013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될 것이라고.

이 글은 2013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행사장 한쪽 벽면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식했던 조각보에 대한 설명으로, 행사 기간 내내 관람객들에게 선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2013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는 해단식을 끝으로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모습을 감추고 한 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아있게 됩니다.

지난 해 6월, 나를 포함한 우리 비엔날레부 직원 7명은 오롯이 감독에게만 의존해왔던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기획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도전해보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비엔날레 역사상 처음 시도되는 일이어서 걱정과 두려움이 없지 않았으나, 전시의 종류와 특성을 정하고 공동감독제를 선택하면서 그 야심찬 시도는 차츰 가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초대작가 숫자의 제한과 작가론적 관점의 전시를 통한 예술적 조형성의 추구(기획전1), 그리고 실용, 즉 쓰임을 중심으로 하는 작품의 예술성 구현(기획전2)이라는 틀을 정하고, 거기에 맞춰 감독 선정을 위한 제안공고를 내걸면서 콘텐츠에 무게가 실리는 질적 수준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핵심전략으로 내세웠습니다.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우며 <익숙함 그리고 새로움>이라는 주제도 우리 스스로 만들어냈고, 전시장 구성과 편리한 전시동선 확보를 위해 건물 1?壙� 3층까지 수백번을 돌며 고심을 거듭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에 조각보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펄쩍 뛰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열정과 정성이 물밀 듯 몰려왔고, 혹시 있을 가을 태풍에 대비해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 끝에 조각보 4면 가운데 2면만을 고정시키면 오히려 깃발처럼 힘차게 펄럭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높이 32m, 길이 100m의 조각보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뒤 쏟아지는 찬사는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비엔날레를 찾은 관람객은 거의 빠짐없이 조각보 앞에서 사진을 찍었고, 감탄을 연발하던 외국 작가들은 앞다퉈 행사가 끝난 뒤 조각보를 선물해 달라는 주문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그 조각보를 걷어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열정과 사랑, 그리고 그 가슴앓이에서 시작되고 사라지는 생성과 소멸의 심오한 세계 역시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겠지요.

조각보를 걷어내며, 그 찬란한 사랑도 가슴 속 깊은 곳에 감취두며 나는 다시 태어날 것들에 대한 생각에 몰입하게 됩니다.

걷어낸다는 것은 새로운 것과 만나기 위한 한 순간의 아픔. 다시 텅 비워질 벽면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은 기다림과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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