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것
사랑 그것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3.08.26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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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장마가 끝나고 햇살은 살을 익힐 것처럼 뜨겁다. 그래도 바람살은 조금 너그러워진 것 같아 조금만 불어줘도 살만하다. 비를 좋아하는 나는 며칠 습기의 관능을 즐겼지만 그것도 계속 되다보니 싫증이 나면서 짜증으로까지 번졌다. 오늘은 뜨거운 햇살이 반갑고 좋다. 그러나 제아무리 좋은 것도 길어지거나 거듭되면 지겨워 진다. 사랑도 그러할까.

세상은 온통 사랑 타령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 영화, 노래가사, 그림까지 모든 주제는 사랑이다. 오랜만에 여고동창회에 나갔다. 그곳에서도 다들 밖에 좋은 사람 하나 두고 싶다는 말을 농담처럼 한다. 내 남편도 나도 집을 나가면 바깥의 사람이다. 부부싸움을 하고 난 뒤에 느끼는 감정은 얼마나 사납던가. 어쩌다가 저 사람을 만났을까, 발등을 찧고 싶었을 때가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그러나 저 사람도 밖에서는 근사한 남자일 수 있다. 남편 입장에서 보면 나처럼 못되고 매력 없는 여자가 또 있을까 싶을 게다.

하지만 나도 밖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괜찮아 보이는지 가끔 눈길을 주는 사람도 있다. 사람살이가 어찌 단순하고 좋기만 하랴. 상대의 장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반면 단점은 파헤치거나 야속하게 생각한다. 아마도 이것이 삶의 우울을 키우는 한계가 아닐까.

지난주 1인1책 교실에 팔순을 넘긴 어른이 나오셨다. 어르신은 첫인사에 “저는 지금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 그 사람도 팔순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합니다. 매일 그녀와 통화를 하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데이트도 합니다. 내가 쓴 글도 함께 읽으며 조언도 해줍니다. 사는 날까지 서로 의지하며 좋은 친구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얼굴이 첫사랑을 고백하는 소년처럼 해맑고 수줍다. 우리는 박수치며 웃었지만 가슴이 뭉클했다.

사랑, 그 아름다운 덫, 선생님은 지금 그 덫에 걸려계셨다. 어쩌면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노인들의 생활에 로맨스보다 더 좋은 활력소가 있을까 싶다. 사람들은 얼굴에 주름살을 펴기 위해 보톡스를 맞지만 사랑을 하는 일은 마음에 주름살을 펴는 보톡스다.

인간이 고안한 가장 아름다운 사건,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모든 예술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형체도 없고 색도 없는 것이, 그 미묘한 것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을 손아귀에 넣고 흔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욕망이 아닐까 싶다. 아주 사소한 일상인 밥을 같이 먹고 영화를 보고 노을 지는 들녘을 손잡고 걷고 싶은 것. 별것 아니지만 함께 하면 행복한 것, 생각만 해도 좋은 사람, 이것이 사랑이다. 모양도 없는 것이 또 힘은 얼마나 센가.

영화나 소설 속에서는 어쩌면 그렇게도 접촉사고처럼 사람을 만나고 때를 맞춰 바람이 불어주고 비가 내리고 오지에서 차가 끊기는 일이 있는가. 그런 낭만적인 만남이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지인이 전시회 행사로 인쇄소에서 행사용 책자를 찾아 낑낑거리며 들고 오는데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혀 책자를 떨어트렸단다. 부딪힌 사람도 그냥 가버리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힐끔힐끔 쳐다만 보지 책을 주워주지 않더란다.

영화에서 보면 멋진 사람이 도와주면서 눈빛이 마주치는 일도 생기는데 자기한테는 그런 일도 안 생긴다며 식식거렸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우리는 아무에게나 그런 일이 생기는게 아니라며 한바탕 웃었던 일이 있었다.

지루했던 장마도 그치고 나면 다시 그리울 것이다. 지키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함부로 가질 수도 없는 사랑, 그것, 그 징글징글한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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