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역
승부역
  • 심억수 <시인>
  • 승인 2013.08.05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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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심억수 <시인>

나는 전생에 마부였나 보다. 어느 역술가가 당신은 역마살이 단단히 끼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참말인가 보다. 나는 혼자 여행하기를 좋아한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떠난다. 차를 몰고 가다 생각나는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간다. TV를 보거나, 영화를 볼 때 경치 좋고 먹거리 좋은 곳이 방영되면 훌쩍 떠난다. 그것이 귀찮고 싫은 것이 아니라 매번 가슴 설레는 걸 보면 팔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모 TV 방송에 우리나라 최고의 오지 승부역이 소개되고 있다. 승부역은 강릉과 부산을 오가는 영동선의 작은 간이역이다. 경북 영주와 강원 철암을 연결하는 철길은 험준한 암벽 산을 관통하는 힘겹고 어려운 공사 구간으로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개통식 날에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해 희생자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기념비를 제막했다고 한다. 승부역은 느린 시간을 타고 느릿느릿 걷는 느림의 여행객이 찾는 곳이란다. 화면에 보이는 주변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나는 주저 없이 차를 승부역으로 몰았다. 내비게이션에 최단거리를 입력하니 223.7㎞, 5시간 40분이 소요된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로 괴산을 지나 연풍, 반곡삼거리, 동예천, 영주, 봉화, 청옥산자연휴양림, 육송정 삼거리에서 직진, 석포역을 지나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철교 아래를 통과하니 승부역 가는 길 12㎞의 이정표가 나를 반긴다.

석포다리를 건너 영풍석포제련소를 끼고 돌아가니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강물이 높은 산을 휘감고 흘러간다. 낙동강 물줄기 따라 난 길을 달팽이가 기어가듯 천천히 풍경을 감상하며 차를 몰았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만끽하며 마음을 치유하는 시간이 언제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좁은 도로의 운전은 느림의 미학 그 자체다. 강원도 오지의 길을 굽이 돌아 느긋한 마음으로 여행을 한다. 승부역 가는 길은 여유를 가지고 자연 속에 나를 포함시키는 시간이었다.

눈부시게 푸른 산발치로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찾아온 승부역이 현수교 너머로 보인다. 차량은 운행하지 못하고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출렁다리를 지나자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세월교가 보인다. 세월교라는 이름에 많은 생각이 스친다. 세월교를 건너서 작은 공간에 차량을 주차하였다. 장시간 운전한 나는 강가의 통나무의자에 앉았다. 잠시 통나무의자에 앉아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느린 걸음으로 승부역으로 향했다.

작으나 아담하고 낡고 헐었으나 초라하지 않은 간이역의 정취를 상상하며 기대에 부풀어 찾아간 승부역 청사는 현대식 건물로 단장되어 있다. 세월의 흔적과 삶의 애환을 느끼려 했던 마음이 저만큼 달아나고 있었다. 다행히 승부역 주변이 마을 하나 보이지 않고 고즈넉하게 예스럽다. 작은 대기실과 빨강 우체통, 철로를 수선할 때 사용했던 핸드카가 옛 정취를 불러오게 한다.

대기실 옆 거대한 돌기둥에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짧은 글이지만 승부역의 존재의 가치와 역무원이 지녀야 할 자존심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역무원에게 첩첩산중 오지에서 혼자 근무하니 외롭지 않으냐고 물어보았다. 역무원은 역은 작지만 모든 열차가 이곳에 정차했다가 가기에 너무 바빠 외로울 시간이 없다고 한다. 느림의 미학을 만끽하려고 찾아오는 사람을 위해 바쁘게 일하는 사람이 있다는 아이러니를 보면서 승부역을 제목으로 즉흥시를 지어보았다.

 

느리게 가야만 다다르는 길 돌고 돌아 승부역에 왔네

한번쯤 느리게 살아보자며 쏟아져 내리는 수많은 사람

기차는 오지에 도심의 소음 부려놓고 느릿느릿 떠나네.

 

느리게 왔건만 왁자지껄 마음이 더 분주한 수많은 사람

기차는 오지에 혼잡한 세월 내려놓고 느릿느릿 떠나네.

 

느림의 여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밀물처럼 스치고 간 승부역 세평 꽃밭의 꽃들이 도심에 지친 나를 보듬고 있다. 세평 하늘에서 쏟아지는 푸른 햇살이 느릿느릿 나를 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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