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초상화(1)
어머니의 초상화(1)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3.07.16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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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경순 <수필가>

나는 그림 그리기에는 재주가 없다. 그럼에도 내가 그린 그림 중에 유명 화가보다도 더 소중하고 가치 있게 평가되는 그림이 있다.

우리 어머니는 숫자는 물론이고 당신의 이름도 알아보지 못하시는 까막눈이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오빠는 몇 년 전, 전화국에 직통 전화 서비스를 신청했다. 덕분에 어머니가 수화기만 들고 있어도 오빠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척인 읍내에 살고 있는 내게 급한 볼일이 있을 때가 문제였다. 때문에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면 오빠가 다리 역할을 해 줄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그렇다 보니 불편한점이 여간 많은 게 아니지만 지금까지도 까막눈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 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나를 사십이 넘은 나이에 낳으셨다. 그러니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학예 발표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면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했지만 나는 5학년을 마칠 때까지 한번도 말씀을 드려 본 적이 없었다. 학예회 날, 친구들은 자기 어머니가 뒤에서 지켜본다는 생각에 서로 잘 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자꾸만 고개를 밑으로 떨구곤 했다.

하지만 가끔, 곁눈으로 힐끔 힐끔 엄마들을 훔쳐보았다. 나랑 제일 친했던 친구의 엄마는, 교실 뒤쪽 게시판에 붙여진 그 애가 그린 그림처럼 예뻤다. 그 애의 엄마는 자식이 그린 그림 앞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밝은 꽃분홍색의 원피스에 파마를 한 머리는 몽실몽실 하늘의 뭉개구름처럼 예뻤다. 또한 얼굴도 검게 그을린 우리 엄마와는 다르게 농촌의 아낙답지 않은 뽀얀 색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 애에게 질투라는 걸 했었다. 왠지 그 애가 미웠다.

우리 어머니를 학교에 부르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그때 홍역으로 많이 아팠다. 지금은 홍역을 가볍게 여기지만 그때만 해도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라 홍역은 정말 무서운 병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나에게 무엇을 시키셨고, 온몸에 열이 났던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앞으로 불러내어 종아리와 손바닥을 때리셨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온몸에 열꽃이 번져 실신을 하고 말았다. 순간 피멍이 든 종아리를 발견한 어머니는 다음날 학교로 달려가 담임선생님의 뺨을 당신의 신발로 때리셨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나는 홍역을 앓느라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이듬해 다시 일학년으로 들어갔지만 그 선생님이 다시 나의 담임이 되었고, 나를 바라보는 그 선생님의 눈빛은 곱지 않으셨다. 그때는 학년이 올라가도 담임선생님과 함께 올라갔었는데 3학년 때까지도 그분은 나의 담임을 맡았다. 그 여파는 5학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은 바로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그 선생님은 5학년 때까지 맡았던 선생님들과 다른 남자 분이었는데 우리 학교로 막 전근을 오신 분이었다. 그래서 인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내게 정말 다정다감 하셨던 것 같았다. 하지만 가만 생각 해 보면 나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에게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내가 아직까지도 유독 그 선생님을 생각 하는 것은 초등학교 생활 5년 동안의 소외감이 유독 컸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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