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36>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36>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8.30 1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덕천교회

일제 핍박에도 굳은 믿음으로 담대하게…
청년 중심으로 애국 계몽운동 소통의 장으로 이용

 샘물처럼 솟아나오는 축복을 받은 '덕천마을' 단양군 가곡면 덕천리 덕천교회는 1924년 6월 5일 창립된 이후 82년 동안 복음의 맥을 잇고 있다. '덕천'은 한양 조씨 문중의 집성촌으로 마을 가운데 '마슴'이라 부르는 샘이 있다. '마슴'은 옛날 이 마을 조씨 문중 며느리중에 나이 50이 넘어 임신해 12개월 만에 큰바위에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학이 나타나 사흘을 울다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 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난 바위를 장수바위라 불렀고, 산모가 마셨던 샘을 마슴이라 불렀다. 또한 하늘에 조씨 문중이 덕을 쌓아 샘물 처럼 솟아나오는 축복을 받았다해서 마을 지명을 '덕천'이라 했다. 사람의 평균 수명을 80세로 본다면 꼭 사람의 평균 수명만큼의 역사를 간직한 교회가 기독교 대한감리교 덕천교회(담임 전도사 박종헌)다. 교회 앞 정자나무 밑에 놓인 넓은 평상에 마을노인 몇몇이 삼복 염천의 불볕을 피하고 있었다. ▲ 마을 앞 정자나무 및 넓은 평상에서 만난 덕천교회 라하실 집사
장마에 피해가 없냐며 인사를 건넸다.

"큰물이 밭을 다 쓸고가 할일이 없어 이렇게 놀고 있다"는 한 할머니는 "올 농사를 다 망쳐 뭘 먹고 살아야할지 걱정"이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뒤로 나즈막이 보이는 덕천교회는 눈 짐작으로도 농촌교회의 열악함과 현재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 덕천교회 다니세요"라며 말을 건네자 평상에 앉아있던 마을 노인들이 각자 교회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다.

그중 덕천교회 라하길 집사를 만날 수 있었다.

"교회를 다니기는 하기만 많이 배우지 못해 아는 것이 없어 전도사님께 도움이 되지 못해 늘 죄송하다"는 라 집사는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이 마을의 몇 안되는 교인 중 한 사람이다.

덕천마을은 지난 90년 큰 홍수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 여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 해 큰 홍수로 인해 가옥이 침수되고, 논 밭이 다 물에 잠기자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교인들도 하나, 둘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덕천리는 한때 한지공장과 도자기 공장 등이 있어서 농촌지역에서 부농에 속했고, 마을에는 100가구 이상 살았던 곳으로 단양에서 살기좋은 3대 지역에 속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몇 가구만이 덕천리의 맥을 잇고 있다.

 애국 계몽운동 소통의 장이였던 덕천교회의 시작

덕천교회는 영춘교회 교인이였던 이장춘씨가 이 마을 조병문씨와 혼인하면서 마을에 기도처를 정하고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그의 전도에 힘입어 교인이 늘어나게 되자 1924년 6월 5일 이장춘씨의 인도로 이 마을에 사는 홍순자, 이순자, 김성녀, 조성진, 김순금씨가 함께 창립예배를 가졌다.

1930년 덕천교회는 교회로서의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고, 이 무렵 교인들이 마련한 헌금과 단양감리교회 후원, 또는 덕천마을 청년단 및 소년단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땅을 매입하고 초가 9평의 예배당을 마련했다.

일제의 탄압과 핍박을 받던 시절, 농촌교회는 청년들과 마을사람들의 문화의 장이였으며, 애국 계몽운동 소통의 장이 되기도 했다.

이 무렵 제천감리교회 전도사, 단양감리교회 담임목사를 초청해 부흥예배를 자주 가져 교인도 하나, 둘 늘어나 예배당이 꽉 차도록 사람들이 몰렸다.

그러나 1944년 일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덕천교회는 폐쇄당하고, 교인 가정에서 몰래 예배를 보다가 광복을 맞으면서 다시 자유롭게 예배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초대 이신영 전도사가 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이후 82년 역사 속에서 많은 교역자들이 전출·입되기도 했으며, 많은 시련과 아픔을 겪어온 교회는 현재 모이는 인원 10여명에 이르는 작은 교회로 전락했다. 그동안 덕천교회를 다녀간 많은 교역자들과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몇몇 교인들의 기도로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교회

"하나님께서 부족한 종을 이곳 덕천교회에서 첫 목회를 하도록 보내실 때는 분명한 계획과 뜻이 있음을 확신합니다"라고 말하는 박 전도사는 교회를 시무한지 7개월 남짓 됐다.

박 전도사는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에서 교회가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기도에 분량을 쌓고 열심히 전도한다면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거둘 수 있으리라 믿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며 굳은 의지를 표했다.

박 전도사가 교회를 시무하면서 전도의 한 방편으로 택한 것은 마을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대소사(大小事)에 참여하며, 성탄절과 부활절을 기해 사람들에게 떡과 음료수 등을 대접하는 등 전도의 씨를 뿌리고 있다.

또한 섬김과 교제가 있는 목회를 하기 위해 교회 온 가족이 에버랜드로 야유회를 다녀 왔으며, 노인들을 모시고 온천을 다녀 오기도 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교회'를 2006년 교회 표어로 정하고 몇 안되는 교인이지만 교인들이 함께모여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심방 및 전도를 하고 있다.

박 전도사는 앞으로 "교인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 제자훈련의 정착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며 "교회를 새로 건축하거나 리모델링 해 교인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성도들 한 명 한 명에 신경쓰며, 자만하지 않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