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넘치는 집념·의지·열정 '성공스토리로 이어진다'
<파워인터뷰>넘치는 집념·의지·열정 '성공스토리로 이어진다'
  • 엄경철 기자
  • 승인 2013.07.03 2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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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국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충북부의장
어릴적부터 꿈꾸던 자동차사업… 운수업으로 꿈 이뤄
1991년부터 3선 군의원… '박근혜 맨'으로 입지 굳혀

주민과 동고동락… 낮은자세로 살피는 현장정치 강조

 

충북택시운송사업조합 이사장·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충북부의장 김병국.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에서 정치가로 변신, 지역정치를 실현하고 있는 인물이다. 청원군의회 의원 3선 중 2회에 걸쳐 의장을 역임할 정도로 탄탄하게 지역 기반을 다졌다. 주변에서는 그를 집념과 의지, 그리고 열정이 넘치는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그의 인생스토리는 굴곡진 여정 그 자체다. 20대에 운수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CEO, 그리고 지역 정치인이라는 이면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이 겪어야 했던 숱한 애환과 사연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가 지난 1일 출범한 제16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충북부의장에 임명됐다. 충북조직의 최고 책임자가 된 것이다. 이 자리는 그다지 드러나는 자리가 아니다. 지방의원 3선에 의회의장 두번 그리고 자치단체장에까지 도전했던 그의 중량감이 무색할 정도로 결코 드러내지 않는 또 하나의 조용한 직함이 맡겨진 것이다. 그는 이를 숙명이라고 여긴다.

 


◇ 유년시절 자동차와의 만남…인생의 전환점

충북 청원군 낭성면이 고향인 그는 5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를 따라 들에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때 논밭을 오가며 나눈 대화를 김 부의장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면서기가 최고인줄 아셨던 어머니는 아들이 커서 공무원이 되길 바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른이 되면 자동차사업을 할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동차도 좋았지만 장남이다 보니 돈을 많이 벌어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김 부의장은 “하루에 한두대 꼴로 마을에 나타나는 자동차를 보면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경유 냄새를 맡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면서 “이 때 품은 자동차에 대한 꿈이 실제로 현실화돼 20대부터 지금까지 택시업을 하고 있으니 운수업이 운명과도 같은 천직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쪼들리는 살림에 대학을 포기한 후 잠시 신협에 취직했던 그는 군 제대후 비로소 자신이 꿈꿔왔던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다. 1977년 택시 한대를 구입하고 기사 2명을 채용해 운행한 것이 운수업의 시작이었다.

“택시 한대에 기사 두명을 채용해 번갈아가며 운행했는데 한달 수입이 500만원을 넘겼다. 당시 공무원들의 월급이 10만원 정도였으니까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택시나 다름없었다. 6개월 만에 택시 한대를 더 구입해 본격적으로 운수업을 확장했고, 1979년에는 충북에서 열린 전국소년체전을 계기로 아예 택시 회사까지 차렸다. 그때 나이 28살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택시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면서 매출이 급격히 떨어지고 수익은 곤두박질쳤다. 급기야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빚쟁이를 피해 다방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빚에 쪼들릴 때는 회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다방에 앉아 전화로 업무를 챙기고, 저녁 늦게 회사에 들어가면 그때까지도 빚쟁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업이 정상화되기까지 8년간 힘든시간을 버텼지만 그래도 운수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때 좌절했다면 34년 노사분규 없는 택시 회사, 충북의 명품택시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다"   

◇ '정치' 새로운 도전

업계의 주목 속에 충북택시운송사업조합 이사장까지 맡으며 운수업으로 성공한 김 부의장은 늦은 나이에 포기했던 배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광주대학교에 입학, 1991년 늦깎이로 대학을 졸업했다. 바쁜 일정속에서도 광주를 오가며 어렵게 마친 공부 뒤에 찾아온 것이 다름아닌 정치입문이다. 사업을 하며 맺은 인맥과 인연이 자연스럽게 지역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한 것이다.

1991년부터 내리 3선 군의원에 오른 김 이사장은 청원군의회 의장직을 연거푸 맡으며 더 큰 뜻을 품게 되지만 그의 정치인생도 예의 시련을 벗어나지 못했다. 2006년 청원군수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경선 무산에 이어 끝내 낙마의 고배를 마신다. 선거 패배 후 휴식기를 가진 그는 2007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청원군 경선대책위원장,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충북선거대책위 전략기획총괄 본부장을 맡아 활동하며 초지일관 '박근혜 맨'으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그는 “낙선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값진 경험을 얻게 됐고 어쩔 수 없이 잠시 탈당이라는 과정까지 거치게 됐지만 잇속에 따라 정치색깔을 달리하지 않고 외길을 걸어왔다"고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정치는 결코 거대담론을 논하는 게 아니다.

정치에 입문하면서 그는 동고동락(同苦同樂)이라는 정치 철학을 갖게 된다. 이웃과 함께, 지역사회와 함께 하며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인의 자세임을 견지하자는 것이었다. “지역을 기반으로 정치를 하려면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는 현장 정치, 낮은 자세의 정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신념을 말한다.

이어 “한국의 정치현실은 여전히 국민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한 점은 과거에 비해 정치 수준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상되어 간다는 사실”이라며 “국민의사 반영 시스템이나 투명성, 감시 견제 기능, 정치자금 의무화, 엄격한 선거법 집행 등에서 정치 선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다”고 덧붙였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정치 외길을 걸어온 김 부의장은 정치인의 자세로 정심(正心)과 정도(正道)를 말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 정치가 올바르게 서려면 정심으로 정도를 걸어야 한다”면서 “유권자들의 인식 수준이 향상되었듯 구습에 젖은 정치나 중앙의 수족이 되고 있는 여건을 개선하지 않으면 지방정치가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 40대의 집념·의지·열정의 소산

그는 20대에 운수업에 뛰어들어 40세에 택시업계 수장인 충북택시운송사업조합 이사장에 오르게 된다. 올해로 무려 8번째 연임이다.

김 부의장의 정치 인생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지방자치제도가 부활돼 실시된 첫번째 청원군의회 의원 선거에서 40세에 당선된 후 연거푸 3선을 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청원군의회 의장을 두차례나 역임하는 등 지역 정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이 처럼 김 부의장이 사업과 정치분야에서 뚜렷한 두각을 보이며, 오늘이 있기까지는 오로지 집념과 의지, 그리고 열정의 소산이라는 것이 주변의 공통된 평가다.

◇ 성공스토리는 이어진다

이제 환갑이 넘은 김병국 부의장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지역사회와 지인들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짙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큰 힘이 되어준 친구와 선배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얘기다.

이들에 대한 보답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어떠한 역할도 주저하지 않고 성심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 척박한 환경속에서 맨손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한 김 부의장에 대해 사람들은 남다른 의지와 강한 집념을 가진 인물로 기억한다. 아울러 김 부의장의 그 열정이야말로 또 하나의 성공스토리를 그려낼 것이라고 믿고 있다.

 

 


◈ 프로필

△ 1952년 충북 청원군 낭성면 출생.
△ 청주대성중, 청주상업고, 광주대학교 졸업.
△ 현 충북택시 대표이사, 충북택시운송사업조합 이사장
△ 2011년 충북희망포럼 공동대표
△ 18대 대선 박근혜 충북선거대책위 전략기획총괄 본부장
△ 제16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충북부의장

 



<정리 연지민 부장·사진 배훈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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