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의 그림자
퇴행의 그림자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3.07.01 2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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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보은·옥천·영동>

‘존 에드거 후버’는 미 FBI(연방수사국) 국장 자리를 죽을 때까지, 장장 48년이나 지켰던 인물이다. 무려 8명의 대통령을 거쳤다. 인사권자인 대통령들은 그를 경계하고 싫어했지만 자르지 못했다.

참모들에게 “이번에야 말로”라며 큰 소리를 치고나서도 그와 독대만 하고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자신의 은밀한 치부들을 차곡차곡 모아담은 비밀파일을 들고온 에드거의 역공에 손을 들기 일쑤였다.

미행과 도청 등 부정한 방법으로 수집한 정보들이었다.

약발이 잘먹는 혼외정사와 부정축재가 주종이었다. 각각 대통령과 법무장관을 맡아 미국을 주도했던 막강 케네디 형제의 합동작전도 그에겐 먹히지 않았다. 분방한 사생활을 즐겼던 대통령의 파일은 형제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툼했기 때문이다.

부통령 시절부터 여자문제로 에드거에게 뒷덜미를 잡혔던 린든 존슨은 대통령 취임후 참모들의 잇단 경질 건의를 뿌리치느라고 애를 먹었다. 그는 7개월후면 정년퇴직해야하는 에드거를 종신 FBI 국장으로 임명해 탄핵했던 참모와 각료들을 경악시켰다.

당시‘라이프’지는 이렇게 비꼬았다. ‘로마의 상원이 몇몇 황제에게 제위에 있는 동안 신의 지위를 부여했는데, 에드거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존슨은 에드거의 힘을 빌어 언론을 압박하고 불리한 기사의 보도를 막는 등 야합을 불사했다.

당내 라이벌이었던 로버트 케네디 등 정치인들의 동향을 수시로 보고받고 대처했다.

에드거에게 도청을 허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당시 법무장관이던 로버트 케네디였다.

에드거가 직속상관인 그를 도청하고 감시한 것은 아이러니이자, 국가 기강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에드거는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의원들을 도청하고 존슨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존슨은 이 대회에서 무난하게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존슨은 에드거의 정치적 공작을 권력 강화와 집권 연장에 유용하게 활용했지만, 자신은 물론 정·관계가 정보기관에 질질 끌려다니는 국가적 퇴행을 방관해야 하는 대가를 치렀다. 대통령도 어쩌지 못한 그는 ‘라이프’지의 표현대로 미국의 황제로 군림했다.

닉슨 역시 취임후 한달에 한번꼴로 에드거를 백악관으로 불러 함께 아침식사를 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필요한 정보를 갖다 바치는 대가였다. 은밀한 사생활을 파헤친 지저분한 정보가 많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언론에 터지자 닉슨은 죽은 에드거를 무척 아쉬워 했다고 한다. 언론인들의 약점을 꽉 잡고 있었던 그가 언론에 재갈을 물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에드거의 사례는 권력이 정보기관의 월권과 일탈에 의지하는 경우 국가적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지난 대선에서 직원들에게 선거개입을 지시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들어놓고도 일상적인 업무였다고 항변했다.

현 남재준 국정원장은 남북 정상회담 발언록을 공개해 정국을 발칵 뒤집어 놨다. 그는 홀로 소신껏 내린 결정이었다고 강조했다. 청와대도 국정원 판단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공식 발표했다. 국정원장이 정치 파동을 넘어 심각한 국론분열까지 야기할 비상한 조치를 대통령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결정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이미 우리 곁에 에드거도 울고 갈 막강한 정보기관장이 부활했다는 얘기가 된다. 정보기관이 절대 권한을 하사받고 그 대가로 정권에 종사했던 어두운 역사로 회귀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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