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 혐의' 친구 구하기…연명 탄원서 작성
'부역 혐의' 친구 구하기…연명 탄원서 작성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3.06.25 2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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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김갑인씨가 겪은 6·25전쟁
<하> 수복 후 뒤바뀐 세상

추석 하루 전 '연합군 진주'…한청 재집결 회합
이웃 친구 등 인공치하 죄 감면 위해 동분서주
수복 후 노동력 동원·군대 주둔 등 민폐는 여전

충남 천안군 성환면 안궁리 안양부락의 김갑인씨(金甲寅·1914~1976·사진). 평범한 농민이 겪었던 전쟁은 참혹하진 않지만 고통, 그 자체였다. 천안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일기는 우리의 부모·할아버지가 겪었던 전쟁을 생생히 전해준다.

◇ 추석 하루 전 ‘연합군 진주’

“요즘 며칠째 이상스럽게도 비행기만 지나갈 뿐 (연합군) 공습은 없었다.”(1950년 9월 22일)

18일 안양부락에서 가까운 가룡리(안궁3리)서는 공습으로 집 세 채가 불타고, 피난민 2명이 죽기도 했는데 다음 날부터 이상스럽게 공습이 사라졌다. 갑인씨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후퇴했기 때문이란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20일 첫 벼를 수확했다. 24일 밤 연합군이 들어왔다. 추석 하루 전이다. “중추가절은 농촌의 제일 좋은 명절이었건만 명절답게 쇠지 못하고 살른지 죽을는지 모르는 신세로 보낼 뿐이다.” 추석이라고 제수를 마련해 제사를 지낼 형편이 아니었다.

이틀 후는 아버님의 65회 생신이었다. “식전에 냇가 둑 콩밭으로 일을 나갔다. 함참 있다가 아내가 들로 나왔다. 아버님께 술을 한 잔 권해 드렸다며 남은 술을 잔에 부어 콩밭에 놓고 눈물을 흘린다. 심장에 불이 붙는 것 같았지만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그 술을 단숨에 마셨다.”

수복 후 세상이 바뀌었다. 29일 한청(韓靑·우익 단체인 대한청년단)이 재집결해 첫 회합을 연다는 연락이 왔다. 이후 구장(區長, 이장)회의, 구서기 회의로 성환에 날마다 가게 됐다.

10월 들어 인공치하 부역자에 대한 처벌이 시작됐다. 갑인씨는 이들의 죄를 경감시키려 동분서주했다. 그중에 가까운 이웃 친구도 끼어 있었다.

“저들의 침략으로 인해 산 사람들이 걱정이며 피해를 입게 됐다. 인공시 역원(役員·간부)들은 모두 주검(시체)이 된다고 한다. 동네 인위장(人委長, 인민위원장)을 지낸 친구의 자수서를 연구해 쓰기 시작했다. 이런 걸 쓴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머리를 썩힐 뿐이었다.”(10월 9일)

“불쌍히 돌아다니는 인간들 가엽기 한이 없으며 자기 죄로 붙들려 갔지만 그 가족들의 애타는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힘자라는 데까지 관(官)에 소청해 죄를 줄이고 감금된 일은 속히 석방되도록 해야겠다.”(10월 10일)

친구를 위해서 안궁리 전 주민 명의 진정서를 준비했다. 전 주민들에게 도장을 받기 위해 돌아다녔다. 가을 추수로 누구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였다. 이웃 마을 궁리까지 갔으나 사람이 집에 없거나 도장을 잃어버렸다고 해 갑인씨를 난감케 했다.

그는 수복 후 다시 마을 일을 도맡는 중심 인물이 됐다. “요즘 피난민 여행증명으로 아침부터 방문자가 많다. 방위대 재편성으로 청년단 내 18세이상 35세까지 인솔해 성환으로 출동했다.”(10월 13일) 성환까지 간 김에 머리를 깎았다. 이발비가 6·25 전보다 2배 올라 300원이었다. 은순이(3살) 과자도 200원어치 샀다.

추곡 도급(稻級) 판정도 그의 몫이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5일 판정일에 아예 나오지 않은 주민들도 있고, 불만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역 혐의를 받은 친구는 이날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갑인씨는 주민 연명 진정서 외에 석방을 위해 여러 ‘노력’을 한 듯했다. “경찰지서 모모인(謀謀人)에게 부탁을 한 후, 친구는 헛 비용만 내고 돌아왔다.”

농사에 도움 안 되는 ‘소용 없는 비’가 추수철 연일 내렸다. “어제 이재호가 찾아왔다. 잘 데가 마땅치 못해 우리 집에서 같이 잤다. 재호는 식량난으로 곤란을 받는다고 해, 여러 사람에게 사정을 해봤으나 불순한 일기로 충분히 장만하지 못했다. 나도 같이 나눠 먹자는 뜻으로 식량을 줄여 쌀 한 말을 내놨다.”(10월 18일) 갑인씨는 지출란에 ‘이재호 백미 한 말 고봉’이라고 썼다. 고봉은 한 말이 넘치도록 줬다는 뜻이다.

◇ 노동력 동원, 민폐는 여전

그는 무슨 이유인지 1950년 10월 20일 이후 이듬해 3월까지 5개월여 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다. 10월 중공군 참전, 1951년 1·4후퇴 등 정국불안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1951년 4월 6일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수입금으로 ‘쌀 한 말 7500원, 수수 4500원, 참깨 3000원’합계 1만5000원. 지출금으로 쇠고기 2근 4800원, 연초 한 근 400원, 빙(얼음과자) 한 개 100원을 적었다. 따뜻한 봄날 어린 딸을 데리고 성환 면소재지를 다녀온 듯하다.

향방대장(鄕防隊長)이 된 그는 대장들 회의에 참석해 간부 훈련 논의를 했다. 향토방위대는 지역 방위와 검문 단속을 위해 조직됐다. 7일 안궁리에도 ‘향방 검문소’가 설치됐다. 아직 전쟁 중으로 사회가 어수선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을 더 힘들 게 했던 건 잦은 출역(出役, 노동력 동원)과 군대 주둔에 따른 민폐였다.

국도 노면 보수와 자갈 깔기에 시도 때도 없이 노동력 동원이 이어졌다. 4월 8,9일 연이어 성환 주둔 1중대 위문 쌀, 교량경비 군인 2명을 위한 쌀을 안양부락이 내야 했다. 주민 청년을 향방훈련생으로 보내면서 훈련생이 먹을 쌀도 주민들이 냈다.

“내일은 군인 위안회를 열어야 한다. 우선 호당 1000원씩 거둬 약간의 안주를 준비하도록 했다. 조기 16마리 1만1000원, 권련(담배) 10갑 3000원. 탁주는 지족향(현 성환 수향1리)에서 두 말을 외상으로 가져왔다. 한 말 9000원(한 되 900원꼴).”(5월 22일)

그는 한탄했다. “국토에 전쟁이 있으면 민폐야 없지 못할 일이지마는 너무 과하게 시달리매 민원(民怨)이 날이 갈수록 높았다. 먹어야 살고 농사도 지으련만, 피난 끝에 털리고 난 나머지를 군폐(軍弊)로 30회씩 털리니 장차 무엇을 먹고 농사는 어떻게 지을는지.”

그는 하는 수 없이 비상시에 쓰려고 땅에 묻어둔 곡식까지 꺼내 도정한다.

1951년 5월 1일 피난민이 새벽부터 길을 덮으며 내려왔다. 다시 불안감이 찾아왔다.“농가에선 못자리 내기로 한참 바쁜 시기인데 농사에 실패하고 또 밀려간다면 무엇을 먹고살는지. 세상사가 한심하기 한이 없다.”

지난해(1950년)는 6·25가 일어났지만 가까스로 모내기를 마치고 피난 갈 수 있어 9, 10월 추수에 지장이 없었다.

갑인씨는 전란을 겪으면서 인공치하 고문 탓도 있었지만 몸이 쇠약해졌다. 갑자기 앞니가 빠졌다. 5월 27일 성환의 광성(光城)치과를 찾았다. 농증이 심해 치아 6개를 새로 해야 했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치아 한 개 1만원씩 6만원이었다.

이해 8월 많은 비가 퍼부어 대홍수가 발생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양회리 둑이 터져 많은 논과 밭이 물에 잠겼다.

전쟁기간 중 물가는 꾸준히 올라 모두를 괴롭혔다. 500원하던 고무신 값이 전쟁이 일어나자 3000원, 5000원으로 뛰더니 3개월 만에 또 7000~8000원이 됐다. “그마저 전시 물건이라 견고하지 않아 30일도 못 신고 해어졌다. 오늘은 비가 와서 하루종일 짚신을 삼았다.”(8월 28일)

쌀값도 치솟았다. 1950년 10월 한 말 4000원, 1951년 4월 7500원, 9월 1일 한 말 1만3000원, 9월 20일 1만9500원으로. 이발비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400원으로 1년 전보다 100원이 올랐을 뿐이다.

해가 바뀌면서 형편은 더욱 악화됐다. “밤이 되면 비행기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전쟁은 언제 끝날는지 마음은 뒤숭�!構�. 경제는 더욱 피폐해지는데….”(1952년 1월 19일)

새해 설날(1월 27일)이 다가왔다. 제수를 장만했다. 대추ㆍ밤 1500원씩, 돼지고기 한 근 6000원, 쇠고기 2근 1만3000원, 수 스루메(물오징어) 5마리 2000원, 건 스루메(마른 오징어) 10마리 2300원 등.

1952년 춘궁기는 어느 해보다 심했다.“생전 처음 당해 보는 기아. 옛날부터 굶어 죽는다는 말은 들었으나 오늘날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3월 3일)

갑인씨는 3월 23일 39회째 생일을 맞았으나 들리는 소리는 모두 우울했다. “아침부터 누가 굶고 있고, 누구는 앓고, 누구는 죽게 됐다는 소리뿐이었다. 궁리(현 안궁2리) 강모씨가 운명했으나 장례를 치를 가족이 없었다. 마을 배급 나오면 제할 생각으로 10만원을 모아서 장례를 치렀다.” 저녁 늦게 이웃 친구 두 명을 불러 탁주 한 잔 나누며 생일을 기념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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