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때문에… 내무서 갇혀 구타 당해
오해 때문에… 내무서 갇혀 구타 당해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3.06.24 2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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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김갑인씨가 겪은 6·25전쟁
현 성환파출소 - 6·25 전쟁때 성환내무서(인공 치하 경찰서). 인공치하 때 노동력 동원된 서울시민들.
<중> 인공 치하 내무서 감금 1주일

피난에서 돌아온지 사흘 후 끌려가 7일간 감금
후유증으로 비관… 가족들 생계위해 마음 돌려

천안 성환면 안궁리 7~9월 79일간 人共 치하
비행기 공습·노동력 동원 등 고단한 나날 보내

충남 천안군 성환면 안궁리 안양부락의 김갑인씨(金甲寅·1914~1976·사진). 평범한 농민이 겪었던 전쟁은 참혹하진 않지만 고통, 그 자체였다. 그의 일기는 우리의 부모·할아버지가 겪었던 전쟁을 생생히 전해준다.

◇ 구타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생

“7일간 감금 당했다가 석방됐다. 밤에도 몸을 굽히지 못하다가 석방된다는 말을 들으니 전신이 가벼워졌다. 여기서 열흘만 있다가는 살지 못할 듯했다.” (1950년 8월 11일)

천안 성환면 안궁리는 7월 7일 오후 인민군이 들어온 후 같은 해 9월 24일 밤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79일간 인민군 지배, 즉 인공(人共)치하에 있었다. 김갑인씨는 피난에서 돌아온 지 사흘 후인 8월 5일 성환 내무서(인공 치하 경찰서·현재 성환파출소 자리)에 끌려가 7일간 감금된 채 심한 구타를 당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썼다.

“애매하게 한 개인의 오해를 산 감정의 피해로 생전 당해보지 않은 곤고(困苦)를 겪으니 참 억울하다. 이날 이 때까지 인정에 넘치는 마음으로, 내 힘으로 될 일이면 매사 적극 협조하고 남을 도와왔건만 오늘의 이 광경은 참으로 억울했다.” 그는 자신이 내무서에 잡혀 들어가 구타 등 고문을 당한 정확한 이유에 대해선 함구했다. 자신을 ‘모함’한 사람에 대해서도 일기에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구타 후유증으로 고생을 했다.

천안 성환 안양부락 인근 약도.
석방 다음 날 갑인씨는 일기에 “아내가 이웃 형님(6촌)에게 돈을 빌려 돼지고기 한근을 샀다”고 한 줄 적었다. 이후 며칠 간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누워만 있을 순 없었다. 8월 들어 뜨거운 폭염이 계속돼 한재가 심했다. 벼가 타들어가 이삭이 영글지 않았다.

“오늘도 대단한 폭염이다. 아직 전신이 쾌차하지 못하나 곡식 밭이 묵어지니 한 포기 풀이라도 뽑아야겠기에 무거운 허리를 끌고 나갔다. 산 같이 우거진 고추밭 풀을 뜯어 퇴비를 마련하고자 한다.”(8월 17일)

같은 날 성환의 여모씨 3인 가족이 비행기 폭격으로 몰사했다. 6·7월엔 소련 비행기 공습, 8월 들어선 연합군 비행기 공습이 극심했다.

19일은 오전부터 단발기 20여대가 평택, 서정리, 성환, 천안을 수없이 공습했다. “밭의 풀을 뜯고 있는 우리 머리 위로 오도가도 못하게 (비행기가)날고 있었다. 인생에 한번 죽음은 정해졌지만 죽음은 낯설어 졸이는 마음에 몸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폭격은 한 시간이나 계속됐다. 공습 와중에도 갑인씨 부인은 남편 타상에 약을 하고자 몸에 좋다는 병아리를 구하러 이러 저리 다녔다. 돌보지 못해 그런지 어린애(3살)는 급체에 걸려 설사를 계속하다 탈진했다.

갑인씨는 비관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는다. “6, 7명 가족이 나 한 몸만을 바라고 있는데 이번 타상으로 영구히 폐인이 되었으니…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딸린 가족들을 위해 내 생명이 없어질 때까지 아낌없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시에도 살아야겠다는 욕심으로 그 흉악한 공습을 무릅쓰고 천안까지 걸어가서 석유통을 짊어지고 왔다. 그리고 종일 꼼짝 못하고 드러누웠다.(8월 22일)

그래도 호박이 있어 든든했다. 70여통이나 수확할 수 있어 대용식으로 먹었다. 보리 도정을 할 수 없어 호박으로 허기를 때울 때가 많았다.

물가가 폭등했다. 모맥(毛麥·도정하지 않은 보리쌀) 한 말이 20일만에 두 배로 올라 2000원이나 했다. 고무신은 한 켤레에 500원 하던 것이 3000원이나 한다고 해 30년만에 처음 짚신을 삼아봤다. 어머니부터 한 족(足)을 삼아 드리고 가족들 것도 삼았다.  

◇ 4박 5일 먼거리 노동력 동원

인공치하 출역(出役·노동력 동원)이 많았다. 방공호를 파든가 다리 복구, 군수품 운반 등이었다. 게다가 민간인을 동원해 보초까지 세웠다. “식전 일찍 김장 밭에 물을 주고 오니 오늘(8월 25일)이 보초 당번일이란다. 밤이면 기후도 서늘한데 밤을 새우게 되었다. 시룡·을세·기순이 함께 4명이 나갔다. 원처(遠處) 노동력 출동 순서를 뽑았는데 나는 26번이었다.”

9월 들어 출역은 더 심해졌다. 연합군 공습 때문에 낮엔 못하고 저녁부터 밤새 일을 시켰다. 10일 성환주조장의 군대원호사무소 앞에 집합, 44분대로 소속돼 박모씨 인솔로 밤늦게까지 일하고 성환의 성풍(成豊) 여관에서 쉬다가 다음 날 오전 5시 집으로 향했다. 귀가 도중 공습으로 인한 위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2일 오전 5시 갑자기 복구작업대 총동원 명령이 내렸다. 재촉이 불과 같이 심했다. 안양부락에선 나를 비롯해 시룡·순길·기철·석기·상옥·장윤·호산·필규·수창 등 10명이 나갔다. 오후 3시 성환에서 모여 천안 두정리(두정동)로 출발했다. 며칠이 걸리는 원거리 복구작업이었다.

국도 큰 길은 공습 때문에 위험해 좁은 길을 좇아 덕용곡(德龍谷·덕고개)으로 나갔다. 오후 5시 천안 구터(두정동) 설씨 집에 식량을 주고 거처로 정했다. 보리쌀로 하루 한 말씩 계산했다.

저녁을 먹고 작업에 나가 ‘못하는 일’을 하고 새벽 4시쯤 돼 고달픈 몸으로 설씨집에 돌아왔다. 갑인씨는 몸은 힘들었지만 설씨네 친절이 큰 위안이 됐다.

“주인의 칠절함은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설씨는 일을 하고 돌아오면 우리에게 많은 위안의 말을 건넸다. 자기네 식찬도 부족하면서 일절 불평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 넘치는 민족애가 참으로 감사했다.”

9월 15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내렸다.(※이날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지만 갑인씨는 알 수 없었다)

“비가 온다고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면서 소정리(세종시 전의면)로 작업 장소를 옮겨야 한다고 재촉했다. 우리 1소대는 할 수 없이 새술막(새酒幕·두정역 인근)까지 내려왔으나 비가 소리쳐 퍼부어 할 수 없이 이곳에 거처를 정했다.

60대 때 아내·처제와 함께.
다음 날 일찍 다시 소정리로 출발했다. 봇짐을 싸고 들고 나섰으나 식량이 거의 떨어져 걱정이었다. 대로로 나가니 직산, 입장, 성거에서 온 노력대원들도 소정리까지 갔다가 식량이 부족해서 돌아온다고 했다. 자기들도 3, 4일씩 일을 하고 해산됐다면서 식량이 없으면 거기 가도 구원처(식량배급처)가 없어 돌려보낸다고 했다. 우리 대원들은 ‘저네들’의 눈치를 살피며 흩어져 부대리(천안 부대동)로 돌아오니 며칠 전 일했던 새술막 작업장이 비행기 공습을 받고 있었다. 직산까지 오니 배가 고파 남은 식량을 팔아 고구마를 사 점심으로 먹었다. 비를 피했다가 해가 저물어 집에 도착했다. 4박5일만의 귀가였다.

갑인씨는 농사 수확량 등급 판정(判定)을 하게 됐다. 전쟁 전에도 공적인 업무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에는 간섭을 하기가 싫고 아직 몸도 편치 않아 거절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전부 와서 권유하며, 인공을 위해서 하기 보다 동민을 위해 나와달라고 해 어쩔 수가 없었다.”(9월 18일) 다른 마을의 한 사람이 갑인씨 판정에 불만을 토로하자 갑인씨는 “그러면 자네가 재조사하라”며 서류를 집어던지고 안양부락으로 돌아왔다. 40여일 전 내무서에 끌려가 일주일이나 감금 당하고 구타를 당한 그로서는 인공과 관련된 일은 무엇보다 하기 싫었을 것이다.

이날 “먼저 노력대원들이 일을 마치지 못했다”면서 소정리로 또 나가야 한다는 엄명이 떨어졌다. 하지만 어찌됐는지 재출역건은 흐지부지됐다.(※연합군 진격으로 인민군이 후퇴할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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